1919년 8월 21일 상해의 프랑스조계 늑로(勒路)동익리(同益里)에서 창간되었다. 이때 사장 겸 주필에 이광수(李光洙), 편집국장에 주요한(朱耀翰), 영업국장에 이영렬(李榮烈)이 취임하였다.
당시 상해에 망명한 지사들이 그들의 공동관심사를 기록하는 한편, 국내외소식 및 독립운동 관련기사를 실어 1주일에 3회씩 발행하던 ≪우리 소식≫이라는 등사판 신문이 ≪독립신문≫으로 발전되었다.
창간취지는 이광수가 쓴 창간사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이 신문의 사명관을 “첫째 민족사상의 고취와 민심의 통일을 이룩하고, 둘째 우리 국민 스스로 보도기관을 운영하여 사정과 사상을 우리의 입으로 알리는 구실을 하는 한편, 셋째 정부를 독려하고 국민의 진로방향을 제시하며, 넷째 문명국민으로서 필요한 새로운 학술과 사상을 소개하고, 다섯째 새로운 국민성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제시하였다.
매호 4면을 발행하였으며 창간 직후는 주 2회 또는 3회 발행의 부정기적 발행을 하였으나, 제9호부터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주 3회(화·목·토요일) 발행을 원칙으로 하였다. 때로는 더욱 자주 발행하기도 하였으며, 경영난으로 인하여 주 1회로 그친 적도 많았다.
판형은 세로 33.5㎝ 가로 23.4㎝로 요즈음의 타블로이드판보다 약간 작았다. 문체는 국한문을 혼용하였고 띄어쓰기는 없이 세로짜기였다. 한글자모는 구할 수가 없어 성경책에서 한글자를 오려내 자모를 만들었는데 이 작업은 조동호(趙東祜)가 맡았다.
활자호수는 세가지(2호·4호·5호)로 다양화시켰다. 매호마다 1면은 사설이나 연재논설을 싣고, 하단에는 <군소리>·<곡중소 哭中笑>·<바른소리> 등 단평을 실었다.
특히, 3·1절기념호, 신년기념호, 지령(紙齡)100호기념호 등에는 제목을 붉은색(제100호·제119호·제138호 등) 또는 초록색(제96호) 잉크를 사용하였고, 종이도 고급인 모조지나 연분홍 색지 등을 썼다.
이 신문은 제호를 세 차례나 변경하였다. 창간 때는 ‘獨立’이라는 제호로 제21호까지 계속하다가 제22호(1919년 10월 25일)부터는 ‘獨立新聞’이라 바꾸었고, 제169호(1924년 1월 1일)부터는 ‘독립신문’이라고 한글로 하였다.
창간 당시의 제작진은 이광수·주요한·조동호·김여제(金輿濟) 등이며, 이영렬이 당시 약 5,000원의 자금을 대고 경영도 맡았다.
이광수는 사설과 논설·단평 등을 주로 쓰면서 간혹 시(제28호의 <간도동포의 참상> 등)를 실었다. 편집이나 취재·집필 등은 주요한이 주로 맡았으며, 제86호(1920년 6월 24일)까지 종사하였다. 김여제는 임시정부 외무부의 선전주임·국무원 비서장대리 등의 임무를 맡아보면서 취재나 제작을 도왔다.
이 밖에도 왕관빈(王觀彬)·박현환(朴賢煥)·최근우(崔謹愚)·고진호(高辰昊)·차관호(車觀鎬)·백성욱(白性郁)·김득형(金得亨)·김차룡(金次龍)·나재민(羅在玟)·유병기(柳炳基)·장만호(張萬鎬) 등이 필진으로 활약하였다.
후기의 제작진은 이광수와 주요한이 떠난 뒤 사장 김승학(金承學)의 부탁으로 박은식(朴殷植)이 주필을, 차이석(車利錫)이 편집국장을 맡았다.
박은식은 이미 제84호(1920년 6월 17일)에 <나의 사랑하는 청년제군에게>, <적과 전승(戰勝)할 능력을 기르라>는 등의 글을 기고한 일이 있었으며, 제100호(1921년 3월 26일) 이후 <적이 흥화문(興化門)을 훼각(毁却)한다>(제157호)·<왜노(倭奴)의 강횡(强橫)이 익심(益甚)>(제159호)·<정부와 우리 민족의 관계>(제183호) 등 많은 글을 써서 독립정신 고취에 노력하였다.
제132호(1922년 7월 8일) 이후에는 윤해(尹海)가 주필을 맡았는데, 그는 프랑스와 시베리아일원에서 활약하던 독립지사였다. 이 밖에도 박운갑(朴雲甲)·김문세(金文世) 등이 기자로 활약하였다.
창간 때부터 재정을 담당하였던 이영렬은 만 2년 동안 재직하였으며, 김석황(金錫璜)·김홍서(金弘敍)·최천호(崔天浩) 등이 경영 또는 일반업무에 종사하였다.
1922년 5월에는 김승학 사장을 비롯하여 백광운(白狂雲)·장기초(張基礎) 등의 출자에 힘입어 그 해 7월에 한문판을 발행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제165호(1923년 10월 13일)에 기사화되었으나 실물은 전하지 않는다.
이 중문보(中文報)에는 우리 정부의 독립운동 상황과 일제의 모순성을 공격하는 기사를 실었으며, 특히 중국인 기자 장헤이츠(張黑池)까지 고용하여 중국의 각 성과 관공서·학교·공공단체 등에 무료로 배포하였다. 신문은 기자들이 직접 돌렸으며, 미국 등 해외거주자에게는 우편으로 발송하였다.
그러나 국내보급망으로는 임시정부의 국내외 연락망이었던 연통제(聯統制)하의 만주 이륭양행(怡隆洋行)과 부산 백산상회(白山商會)의 연락원들이 몸에 숨기고 다니면서 보급하였다.
신문발행 이외의 사업으로 ≪독립신문총서 獨立新聞叢書≫를 발간하고 나다니엘 페퍼의 저서를 김여제가 번역한 한글판 ≪한국독립운동의 진상≫과 한문판인 ≪한국진상 韓國眞相≫, 이광수의 ≪독립신문 논설집≫ 등을 발행하였다.
이 밖에도 박은식 편술 ≪한국독립운동사≫ 상편과 ≪이순신전 李舜臣傳≫도 만들었다. 발행부수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집안(集安)·통화(通化)·연길(延吉)·호놀룰루 등 15개의 지국과 흥경(興京)·임강(臨江) 등 21개의 분전소(分傳所)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미보 韓美報≫·≪신한민보 新韓民報≫ 등의 대리판매도 하였다.
이 신문은 원래 영리를 목적으로 한 신문은 아니었으며, 지대수입(紙代收入)이나 광고수입이 거의 없어 사장 김승학은 할인판매제·명예사원·특별사원 등을 모집하는 ‘사원징구간장(社員徵求簡章)’까지 만들어 사세확장을 꾀하였지만 경영난은 여전히 극심하였다. 그리하여 1924년에는 한층 어려워진 경영난으로 주 1회 발행하던 신문을 월 1회 발행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신문의 기능은 독립운동을 격려하고 자립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상해에 거주하고 있는 1,000명에 가까운 교민들을 한데 묶는 정신적 구심체로서의 구실을 하였으며, 상해지방의 소식통으로서도 중요한 구실을 맡았던 것이다.
초기에는 일본의 포악함과 잔학성을 폭로하는 기사와 사진·논설이 면면히 이어졌고, 중반기와 후반기에는 국내의 유력 일간지의 논조가 일제에 지나치게 협조적인 점을 들어 반박하는 논설을 싣는 등, 1925년 9월 25일(제189호) 극심한 재정난과 일제의 간접적인 탄압에 의하여 폐간될 때까지 일제를 정면으로 공격하고 통렬하게 비판하고 나섰던 선봉장으로서 항일투쟁언론의 정도를 고수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