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 억은 1918년에 배화학당(培花學堂)의 교사직을 그만두고 내려와 1919년 9월 사재로 10칸짜리 예배당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모곡리 부근에 학교가 없는 것을 알고 교회 건물에 모곡학교라는 간판을 달아 학생을 모집하였다. 수업연한 4년에 보통학교 정도의 학과를 가르쳐 1923년 3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당시의 교과목은 국어·산술·역사·지리·이과·창가·영어·체조·실업·공작·서도·일어·한문 등이었다. 그 뒤 계속적인 학생의 증가로 1923년 9월에 사회 유지들의 기부금을 모아 100여 평의 신교사와 기숙사를 신축하였으며, 1925년 3월 6년제의 사립보통학교로 인가되어 교실을 확장하고 교사를 증원함으로써 학교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이 때 각 지방에서 모여든 학생들은 7, 8세에서부터 30대 중반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으로 구성되었으며 서울에서 찾아오기도 하였다. 특히 남궁 억은 국어교육과 국사교육을 중요시하여, 자신이 ≪조선어보충 朝鮮語補充≫이라는 우리말 교과서를 편찬하는 등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의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실업을 중요시하여 학생들에게 등하교 시간을 이용해서 나무와 거름을 한 짐씩 하는 습관을 몸에 배도록 하였으며, 여러 가지 노작교육을 통해 건전한 근로정신의 함양에도 주력하였다. 학교의 실습지에는 무궁화 묘목을 심고 가꾸어 전국 각 지방의 사립학교와 교회 및 사회단체에 우리 나라 국화인 무궁화에 관한 인쇄물과 함께 묘목을 기증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33년 11월에 무궁화 및 한국역사 사건으로 남궁 억이 일제에 붙잡혀 이듬해 제12회 졸업생을 마지막으로 폐교되었으며, 학교 재산은 몰수되고 학교는 공립국민학교로 일본인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모곡학교는 일제강점기에 설립되어 민족의식의 고취와 항일독립정신 앙양에 기여하였으며, 광복 후 1954년에는 남궁 억의 교육이념을 계승한 제자들이 모곡학교의 옛자리 서편에 한서중학교(翰西中學校)를 설립하여 현재까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