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군 ()

대동여지도 중 함경북도 무산 부분
대동여지도 중 함경북도 무산 부분
인문지리
지명
광복 당시 함경북도 서북단에 있었던 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광복 당시 함경북도 서북단에 있었던 군.
개관

도내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군으로, 동쪽은 부령군과 경성군, 서쪽은 함경남도 혜산군, 남쪽은 길주군, 북쪽은 두만강을 접하고 있다.

동경 128°3′∼129°35′, 북위 41°13′∼42°26′에 위치하며, 면적 6,163.91㎢, 인구 10만8552명(1945년 현재). 1개 읍 9개 면 40개 동으로 되어 있다. 군청 소재지는 무산읍 성천동이다.

자연환경

지형적으로는 백두산에서 서남으로 뻗어 있는 마천령산맥과 남북으로 뻗어 있는 함경산맥과 두만강으로 둘러싸인 고원 지대로서, 대부분의 지역이 높이 1,000m 이상 되는 용암 지대로 형성되어 있다.

주요 산악으로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높은 백두산(2,744m)을 비롯, 소백산(2,174m) · 북포태산(北胞胎山, 2,289m) · 아무산(阿武山, 1,803m) · 백사봉(白砂峰, 2,099m) 등이 마천령산맥의 주봉을 이루며, 함경산맥에는 곤봉산(坤峰山, 1,927m) · 도정산(渡正山, 2,201m) · 관모봉(冠帽峰, 2,541m) · 투구봉(2,335m) · 황토암(黃土巖, 2,043m) 등의 높은 봉우리가 무수히 솟아 있으며, 이들 주봉을 분수령으로 연면수(延面水) · 서두수(西頭水) · 소홍단수(小紅端水) 등이 협곡을 이루면서 두만강으로 흘러든다.

지질은 연면수 유역 일대는 화강편마암을 기반암으로 하여 중생계의 화강암이 탁월하며, 서두수를 중심으로 한 유역 일대는 화산 활동에 따라 현무암을 비롯, 조면암 등 염기성 바위류의 분포가 태반을 이루고 있다. 평지가 거의 없으며, 각 하천의 양안에 조금 발달되어 있을 뿐이다.

토양은 화강암 지대인 연면수 양안은 사양토(砂壤土)이며, 서두수 양안은 식양토(埴壤土)로 비교적 부식의 함량이 많다. 산림은 전국 제일의 원시림 지대로 면적이 60만4737ha나 되며, 주로 낙엽송 · 활엽수 등이 두만강재(豆滿江材)라 불리며 벌채되고 있다.

기후는 고위도에 위치하고 내륙의 고원 지대인 까닭에, 한서(寒暑)의 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이다. 연평균 기온 5.7℃로, 1월 평균 기온 ·13.4℃, 8월 평균 기온 21.9℃이며, 연 강수량은 536.5㎜로 우리 나라에서 가장 비가 적은 지역 가운데 하나이다.

역사

고대

호곡동에서 움집 주거지가 발굴되어 빗살무늬토기 등이 나왔고, 인접지인 회령 · 종성 · 경성 등지에서 구석기 시대의 동물 화석 · 큰사슴뿔 · 골각기 등과 신석기 시대의 조개더미 · 석기 · 토기 등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선사 시대에 이미 사람이 살았음이 확실하다. 특히, 이곳은 단군신화와 관련된 백두산(태백산)이 소재하는 곳으로, 국조 강림의 성역에 속하여 있다.

중국의 역사서 《사기》에 의하면, 이 지역은 서기전 수세기에 걸쳐서 숙신(肅愼) · 읍루(挹婁) · 예맥(濊貊) · 옥저(沃沮) · 부여(夫餘) 등 여러 부족 국가의 흥망성쇠가 있었던 곳이며, 삼국 시대는 고구려에 속하여 있었다.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고구려가 멸망된 뒤, 한때 당나라의 치하에 있다가, 698년 고구려의 유민이 발해를 세우자 그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 속하여 있었다.

고려

고려 초기 발해의 영역에 속하여 있었으나, 926년 발해가 거란에 의하여 멸망된 뒤, 대륙에서 요(遼) · 금(金) · 원(元)이 교체되는 가운데, 여진족의 근거지가 되었다.

여진족의 일부는 점차 함경도 남부에까지 이동하여 고려와 충돌이 잦았으나, 원 · 명(明)의 교체와 더불어 추진된 공민왕의 북진정책에 의하여 여진족을 몰아내고 함경남도 갑산에서 두만강 하구에 이르는 선까지 경계를 확보하였으나 이 지역은 여진의 세력하에 있었다.

조선

세종 때 육진을 개척할 당시까지도 이곳에는 여전히 여진족이 살고 있어 조선의 행정력이 완전히 미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438년(세종 20) 인접지인 부령군 관내 지금의 고무산에 만호진을 두었으며, 1509년(중종 4) 그 서쪽 지금의 폐무산으로 진을 옮겨 첨사진(僉使鎭)으로 승격시켰다가, 1674년(현종 15)에 이르러 다시 지금의 군청 소재지인 삼봉평(三峯坪)에 진을 옮겨, 비로소 무산이라 하였다.

1684년(숙종 10) 부(府)로 승격, 부령의 차유령(車踰嶺) 서쪽 지방과 회령의 일부 지방을 이에 병합하고, 풍산보(豊山堡)를 예속시켰다. 1694년 읍성을 축조하였다.

근대

1895년 갑오개혁에 의한 지방관제 개편 시 부에서 군(郡)이 되고, 19개 사(社)가 10개 면(面)으로 통합되었다. 이 군은 전국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군이지만 대부분의 지역이 백두산 기슭의 원생처녀림으로 되어 있어 첩첩산중이므로 화전민이나 겨우 살 정도로 발전이 되지 못하였다.

근대에 와서 임산자원 개발 사업이 본격화되고, 1929년무산선과 산림철도인 백무선이 개통됨과 아울러, 1935년 동양 굴지의 무산철산이 개발된 뒤로 크게 발전하였고, 1938년무산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근대 인물로는 우리 나라가 일제에 강점당한 뒤 북간도로 망명하여, 국민회 독립군 사령관 안무(安武)와 더불어 경호대장으로 활약하면서 군자금 모금과 무기 공급 등 항일 투쟁에 일생을 바친 양한호(楊漢虎)를 들 수 있다.

유물ㆍ유적

최근 호곡동의 이른바 ‘범의구석원시유적’이 발굴, 보고된 바 있는데, 이는 신석기 시대에서 초기 철기 시대에 걸친 주거지로서, 총면적 4만㎡에 달하며, 10여 개소의 주거지와 석기, 동물의 뼈나 뿔로 만든 도구, 굽 달린 독특한 형태의 토기 등이 발견되어 중요한 선사 유적지로 보존되고 있다.

이 밖에 북방 경계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무산읍성을 비롯한 여러 개의 성과 진보(鎭堡)가 있다. 무산읍성은 1694년(숙종 20) 부사 이천근(李天根)이 주위 1,886m에 높이 4.5m의 석성으로 축조한 것이며, 1754년(영조 30) 부사 이언충(李彦忠)이 여기에 남문과 서문을 세웠고, 1757년 부사 유춘수(柳春修)가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풍산진(豊山鎭)은 무산읍에서 북방으로 34㎞에 있으며, 주위가 1,245m에 높이가 180m에 달한다.

무산읍에서 북방으로 10㎞ 되는 영북면 양영동에는 양영진(梁永鎭)이 위치하고 있으며, 또한 읍에서 북방 2㎞에는 주위 300여m에 달하는 마을우고성(亇乙亏古城)이 천혜의 단애 절벽상에 남아 있다.

한편, 무산읍 독소동에는 주위 300여m에 이르는 석성인 독소고성(篤所古城)이, 그리고 읍에서 서쪽으로 25㎞ 되는 곳에 주위 650여m나 되는 석성인 임강대고성지(臨江臺古城址)가 남아 있다. 영북면 양영동에는 석성을 축조하였던 천작성(天作城)의 터가 남아 있다.

교육ㆍ문화

옛 교육기관으로는 향교가 있었으며, 여러 촌락에는 사설 서당이 있어 많은 유생을 교육시켰다. 신교육기관으로는 공립초등학교로 1911년 무산공립보통학교가 창설된 것이 처음이며, 사립중학교로 무산명륜학원(茂山明倫學院)이 이때 설립되어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23년 ,삼장(三長)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고, 1928년 연상(延上)공립보통학교의 개교를 계기로, 1면 1개교의 교육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일제 말엽 무산여자상업보습학교(茂山女子商業補習學校)와 무산중학교가 설립되었고, 읍내에 독소사립학교(篤所私立學校)와 창렬사립학교(彰烈私立學校)가 개교되었다.

194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4개소, 초등학교 25개교, 여자상업보습학교 1개교, 중학교 1개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종교 상황으로는 불교 사찰 3개소, 포교소 1개소가 있으며, 개신교는 장로파 교회 5개소가 있다.

이 고장 설화로는 〈삼지연(三池淵) 선녀전설〉을 들 수 있다. 삼지연은 백두산 기슭의 넓은 대지(지금은 천평이라 부름.)의 남쪽 끝에 크고 작은 3개의 연못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상 선경에 여름이면 하늘에서 세 자매의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즐기고는 하였다.

이 근처 백두산 뒤쪽에 오랑캐가 살고 있었는데, 욕심이 많고 심술궂은 추장이 소문을 듣고 선녀를 붙잡고자 수십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이곳에 당도하였다. 추장은 수풀 속에 숨어 며칠을 기다렸으나 선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화가 난 추장은 호수를 더럽히고 호반을 어지럽게 한 뒤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천평을 다 지날 무렵 갑자기 천지가 캄캄해지더니 뇌성벽력과 함께 하늘에서 돌과 모래와 재가 비오듯 쏟아져 천평 일대를 덮어 버렸고, 부정을 탄 오랑캐 일행도 그 속에 묻혀 버렸으며, 그 뒤 선녀는 다시 나타나지 않고 연못만이 남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오늘날 이 못을 삼지연이라 부르는데, 백두산을 맹호에 비긴다면 삼지연은 아리따운 처녀와 같은 선경이라 할 수 있다.

민요로는 “무산령 넘어에 정든 안깐 두 두만강 뗏목에 이내 몸 실었네.”라는 사설에서 보듯이, 고향을 등지고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나 간도로 떠나는 남자의 애환과 떠난 임을 그리는 여인의 안타까움을 담은 〈애원성〉이 일찍부터 불렸으며, 시집살이의 고달픔을 노래한 〈시집살이노래〉가 널리 불렸다.

민속놀이로는 지난날 청년들 사이에 수시로 행해지는 사자놀이가 있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자취를 감추고, 지금은 세시풍속으로 음력 정월을 전후한 윷놀이 · 쥐불놀이와 단오 · 추석에 행해지는 씨름 · 그네뛰기 · 널뛰기 · 연날리기 등이 전해 오고 있다.

이 고장 윷놀이는 기후 관계로 옥내에서 행해지는데 윷가락도 나무윷은 거의 없고 강낭콩윷이 대부분이다. 특히, 정월 보름날 밤 부녀자들이 모여 윷놀이로 그해 운수를 보는 윷점이 있는데, 나무 한쪽 면을 깎아 흰 칠을 한 윷 네 개와 《당년수책 當年數冊》이라는 점서(占書)를 갖춘 다음, 소반 위에 청아수를 떠 놓고 제단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윷 세 번을 던져 흰 면의 수에 따라 점서와 대조, 운수를 점친다.

촌락제로는 마을에 맹수로부터의 피해를 막고 괴질이 유행하지 않도록 가호해 달라고 음력 3월 초 산천신께 기원하는 산천제가 있으며, 산간오지의 재가승(在家僧 : 귀화 여진) 촌락에서는 이와는 별도로 음력 설날 산치성(山致誠)을 지내는데, 그 목적은 일반 동제와 같지만 방식 · 절차 · 제물 등이 이색적이다.

산업ㆍ교통

산간 지역으로 관내의 90% 이상이 산지로 덮여 있으며, 경지면적은 군 총면적의 2.7%인 1만6831ha를 차지하여 전국에서 가장 낮은 경작률을 나타내는 지역이다. 이 중 논의 면적은 190ha에 불과하다.

주요 밭작물로는 보리 · 귀리 · 콩 · 조 · 피 · 감자 등이 생산된다. 특히, 감자는 크고 전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 질 좋은 감자로 전국적으로 ‘무산감자’라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유명하며, 이를 원료로 무산읍 내에서 생산되는 전분 생산량은 한때 전국 제1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가내 부업으로 소 · 돼지 · 면양 등의 사육도 활발하다. 한편, 원시림이 우거져 전국 제일의 목재 생산지로도 유명한데, 벌채된 목재는 서두수와 연면수의 강을 따라 뗏목으로 운반되었으며, 산업철도인 백무선 · 무산선 · 혜산선 등이 개통되면서 철도편으로 무산 · 고무산 · 회령 · 길주 등지로 운반되었다. 지하자원으로는 무산철광이 유명하며, 이곳에서 생산되는 자철광(磁鐵鑛)은 청진의 제철공장으로 운반되었다.

교통으로는 1929년에 개통된 산림철도인 무산선이 부령군의 고무산에서부터 무산까지 연결되며, 1944년에 개통된 백무선이 혜산선의 백암으로부터 무산까지 연결되어, 벌채된 원목을 운반하는 데 이용된다. 한편, 국도가 회령 · 부령 · 길주군 및 함경남도 혜산군으로 뻗어 있으며 두만강을 따라 국경 도로가 있다.

시장으로는 무산읍시장 · 연사시장 · 삼장시장 등이 있다. 무산읍시장은 본래 곡류 · 가축 · 신탄 등이 거래되는 5일장이었으나, 1935년 무산철산이 채굴되면서 무산읍이 신흥도시로 발전함에 따라, 매일장으로 바뀌었다.

종전에 비하여 취급 물자도 다양해져서 소 · 돼지 · 닭 등의 축산물과 곡류 · 채소 · 과일 · 의류 및 생활필수품과 기타 각종 수산물이 거래되며, 인근의 각 촌락에서 모여드는 장꾼으로 성황을 이룬다.

연사시장이 열리는 연사면 사지동은 철도와 도로의 교통 중심지로 각 지역의 물자가 집산되어 예로부터 시장이 번성하였다. 거래 품목은 원목을 운반하기 위한 소와 감자 · 곡류가 주종을 이룬다. 삼장시장은 5일장으로 축우를 비롯한 각종 가축류와 곡류 · 생활필수품 및 원목 벌채 용구 등이 주로 거래된다.

읍ㆍ면

무산읍(茂山邑)

군의 북서부에 있는 읍. 면적 108.76㎢, 인구 5만4295명(1945년 현재). 읍 소재지는 성천동이다. 이 읍은 원래 세종 때 육진 개설 당시만 하여도 여진족이 살고 있던 시배보성(施陪保城)의 옛터였다.

남쪽 경계에는 독소령(篤所嶺, 1,562m)이 솟아 구릉지대를 이루며, 차유령에서 발원한 성천수가 읍의 북부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두만강으로 흘러든다. 두만강과 성천수가 합치는 삼각 지대의 높이 477m가 되는 대지 위에서 남산을 바라보며 시가지가 발달하였다.

원래 첩첩산중이어서, 지방 행정기관과 수비대 정도가 자리잡고 있던 소도시에 불과하였으나, 1929년 무산선의 개통과 더불어 무산철산이 개발되고, 그 뒤 산림철도인 백무선이 부설됨에 따라 광공업 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어, 1938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무산철산은 읍내 동쪽 성천수의 건너편 창렬동에 높이 솟아 있는 산으로, 준편마암에 배태된 총매장량 13억만t에 달하는 국내 제일의 자철광상(磁鐵鑛床)이다.

이곳에서 채굴되는 광석은 현지에서 분철(粉鐵)로 선광되어 철도편으로 청진과 성진 등지의 여러 제철공장에 공급된다. 도로가 사면으로 통하며, 산업철도인 무산선과 백무선의 출발 지역으로 군내에서 가장 교통이 편리하다.

유적으로는 주위 약 2,072m, 높이 5m 되는 무산읍성의 일부와 독소고성이 남아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교, 중학교 1개교, 여자상업보습학교 1개교가 있다. 성천(城川) · 남산(南山) · 칠성(七星) · 독소(篤所) · 창렬(彰烈) 등 5개 동이 있다.

동면(東面)

군의 동북부에 있는 면. 면적 349.25㎢, 인구 5,241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풍산동이다. 북쪽에는 민사봉(民使峯, 1,409m)과 차유봉(車踰峰, 1,559m)이 솟아 있고, 동쪽에는 차유령(車踰嶺, 914m)이 있다.

서남쪽에는 함경산맥의 주봉인 관모봉에서 북으로 달리는 지맥에서 갈라진 여맥이 두만강가에까지 뻗어 면의 경계를 이룬다. 차유령 기슭에서 모여든 성천수는 면의 중앙을 서북으로 흘러 무산 읍내의 동쪽을 스쳐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면의 대부분이 산악 지대로 농산물은 주로 조 · 피 · 귀리 · 보리 · 수수 · 옥수수 · 콩 · 녹두 · 강낭콩 · 감자 등이 생산되며, 광산 도시로 발전한 무산읍과 인접하고 있어 배추 · 양배추 · 무 · 당근 · 우엉 등의 야채 재배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밖에 소 · 돼지 · 닭 등의 가축 사육도 많은 편이다.

면내의 산림 지대는 대체로 이깔나무 · 박달나무 · 적송 · 황병나무 · 버드나무 등의 혼성림(混成林)을 이루며, 이 가운데 활엽수는 신탄재로 쓰이고, 침엽수의 대종을 이루는 이깔나무는 용재(用材), 철도용 침목, 광산용 갱목, 전주, 기타 건축용 자재로 이용된다.

용재와 침목은 일단 이곳 제재소에서 제재된 뒤 철도편으로 수송된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풍산(豊山) · 차유(車踰) · 강선(降仙) 등 3개 동이 있다.

삼사면(三社面)

군의 가장 남부에 있는 면. 면적 2,254.39㎢, 인구 6,652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유평동이다. 서쪽에는 함경남도와 함경북도를 갈라놓은 마천령산맥이 가로놓여 최가령(崔哥嶺, 1,572m) · 아무산 · 황봉(黃峰, 2,047m) · 백사봉 등이 장벽을 이루고, 남쪽에는 함경산맥의 고두산(高頭山, 1,988m) · 괘상봉(掛上峰, 2,139m) · 궤상봉(櫃床峰, 2,333m) 등이 솟아 있으며, 북쪽의 중앙에는 청봉(靑峰, 1,528m)과 곽지봉(郭支峰, 1,688m)이 솟아 있다.

이와 같이, 이 면은 백두산록의 처녀 원시림이 뒤덮여 있는 현무암대지로서 삼각 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의 삼장면과 더불어 무산고원이라 불린다.

하천으로는 마천령산맥의 동쪽과 함경산맥의 북쪽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동계수(東溪水) · 형제수(兄弟水) · 박천수(博川水) 등이 합쳐져 서두수가 되어 면의 중앙을 북류하여 삼장면을 거쳐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농산물로는 주로 조 · 보리 · 귀리 · 감자 등이 생산되며, 특히 화전농가에서 생산되는 감자는 알맹이가 크며 전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질이 좋기로 이름나 있다.

한편, 고산장과(高山漿果)인 들죽은 이 고장 특산품으로 유명하다. 이 면의 부원을 이루는 목재는 두만강재로 알려진 이깔나무로서 평균 수령이 무려 180년이나 되고 크기가 36m에 달하는 우수한 목재이다.

이 거대한 원목이 지난날에는 뗏목에 의하여 운반되었으나, 백무선이 개통된 뒤로는 철도편으로 길주 · 성진 방면에 수송된다.

교통은 백무선이 연면수를 끼고 달리다가 유평에서부터는 강줄기에서 벗어나 방향을 바꾸어 서두수쪽으로 뻗어간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4개교가 있다. 유평(楡坪) · 호평(芦坪) · 창평(倉坪) · 연암(延巖) 등 4개 동이 있다.

삼장면(三長面)

군의 서북단에 있는 면. 면적 1,014.23㎢, 인구 6,111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삼상동이다. 백두산이 서북단에 있고, 그 아래 대연지봉(大臙脂峰, 2,359m) · 소연지봉(2,123m) · 선오산(鮮奧山, 1,985m) · 와사봉(臥獅峰, 2,145m) · 간백산(間白山, 2,163m) · 증암산(增巖山, 2,140m) · 소백산 · 북포태산 등의 화산군이 마천령산맥을 이루어 남동으로 뻗어 있으며, 두만강의 최상류에는 적봉과 증산이 있다.

하천은 두만강 원류 지방에 돌수(乭水)가 있고, 그 아래 무포천(茂浦川) · 소홍단수(小紅湍水) · 서두수 등이 북류하여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백두산록의 현무암대지를 무산고원이라 부르는데, 높이 1,500m의 이 고원은 처녀 원시림의 수해(樹海)를 이루고 있으며, 이곳 낙엽송림은 수령이 200년, 키가 36m로, 채벌 한계선은 소홍단수 유역과 무포까지이며, 채벌된 원목은 뗏목으로 철도 연변까지 운반된다.

농가는 대부분이 화전민으로 귀리 · 감자 · 아마 · 아편 등을 재배한다. 면 서남쪽에는 〈삼지연선녀전설〉이 얽혀 있는 삼지연이 있으며, 이곳에서부터 백두산 기슭까지를 ‘천평(天坪)’이라 부른다.

다시 북상하면 두만강 원류 지방 가까이에 신무성(神武城)이 있는데, 이곳은 18세기 초 한때 청병(淸兵)이 주둔한 일이 있으며, 등산가의 야영지로도 유명하다. 한편, 백두산정과 대연지봉 사이에는 정계비(定界碑)터가 남아 있다.

도로는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길게 뻗어 있으나, 삼림철도는 통과하지 않아, 벌채된 원목은 두만강을 따라 뗏목으로 철도 연변까지 수송된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삼상(三上) · 삼하(三下) · 농사(農事) 등 3개 동이 있다.

서하면(西下面)

군의 중앙 북부의 두만강변에 있는 면. 면적 133.07㎢, 인구 4,732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삼천동이다. 면내는 두만강변의 개석지(開析地)로 높은 산이 없고, 낮은 구릉 지대를 이룬다. 연면수의 하류가 면의 중앙을 남에서 북으로 관통하여 두만강으로 흘러든다.

농산물로는 주로 조 · 보리 · 피 · 수수 · 옥수수 · 귀리 · 콩 · 강낭콩 · 감자 등이 생산되며, 특히 감자는 전분의 함량이 많아 품질이 좋기로 이름나 있다.

축산업으로 소 · 돼지 · 닭 등의 사육이 활발하다. 하면강구(下面江口)는 연면수가 두만강으로 흘러드는 강어귀에 있으며, 일명 ‘흥암(興巖)’이라고 한다.

이곳은 지난날 어하 · 연상 · 연사 등 3개 면에서 흘려 보내는 연면수의 뗏목을 모아 두만강식 뗏목으로 다시 엮는 작업장으로 번창하였던 곳이지만, 백무선이 개통되면서부터 원목의 대부분이 철도편으로 수송됨으로써, 다만 삼장면의 두만강 상류에서 내려오는 뗏목을 집산하는 저목장(貯木場)의 구실만을 하게 되었다.

이곳에 집산되는 목재는 소위 두만강재로 불리는 낙엽송으로 길고 강인하여, 전주 · 철도용 침목 · 광산용 갱목 · 교량용재 기타 건축용 자재로 널리 쓰이는 목재이다.

교통은 산업철도인 백무선이 연면수를 따라 들어왔다가 하면강구로부터는 두만강을 스쳐 무산으로 달린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삼천(三川) · 임강(臨江) · 흥암(興巖) 등 3개 동이 있다.

[어하면 漁下面]

군의 북동부에 있는 면. 면적 350.08㎢, 인구 3,561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허언동이다. 북쪽으로 무산읍과의 경계에 독소령(1,562m)이 있고, 서쪽으로 연사면과의 경계에 검덕산(劍德山, 1,901m)이 있으며, 남쪽과 동쪽 경계에는 함경산맥이 가로놓여 곤봉산과 북성령(北城嶺, 1,722m)이 있다.

하천으로는 연면수의 지류인 죽림천이 곤봉산 기슭에서 발원하여 서부 지역의 검덕산 동쪽을 북으로 흐르다가 허언동에서 갑자기 서쪽으로 유로를 바꾸어 연상면에서 본류와 합친다.

농산물로는 주로 조 · 피 · 보리 · 수수 · 옥수수 · 귀리 · 콩 · 강낭콩 · 감자 등이 생산된다. 가축으로는 원목을 운반하기 위하여 소를 많이 사육한다.

동남쪽의 함경산맥 일대는 백두산록의 처녀원 시림이 뻗은 밀림 지대로 평균 수령 170년에 달하는 낙엽송림이 우거져 있으며, 기타 낮은 지역은 이깔나무를 주축으로 잣나무 · 적송 · 부음비 · 떡갈나무 · 노루나무 · 황병나무 등의 침엽수와 활엽수의 혼성림을 이루고 있다.

면의 남부 북성령에는 주변에서 채벌한 나무의 저목장이 있으며, 이곳의 원목은 동해쪽 주을역에서 이곳까지 부설된 원목 운반용 기동차에 의하여 수송된다.

그 밖의 지역에서 벌채되는 원목은 일부는 트럭으로 신참(新站)까지 수송되며, 대부분은 온천동 십리평에서 중림천을 이용하여 뗏목으로 연면수와의 합류 지점인 상창동까지 운반된다.

도로가 사면으로 뚫려 있어 무산읍과 더불어 군내에서 비교적 교통이 편리한 지역이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허언(虛彦) · 온천(溫川) · 오봉(五峯) 등 3개 동이 있다.

연사면(延社面)

군의 중앙에 있는 면. 면적 1,030.95㎢, 인구 1만5504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사지동이다. 면의 경계에는 투구봉[兜峰] · 궤산봉(机山峰, 2,277m) · 북세령[北雪嶺, 2,442m] · 홍대봉(虹臺峰, 2,471m) · 서관모봉(西冠帽峰, 2,432m) · 관모봉(2,541m) · 북관모봉(2,500m) · 도정산(渡正山, 2,201m) 등의 2,000m 이상 되는 높은 산이 줄지어 있다.

이 산맥의 서쪽은 완만한 경사의 낙엽송 밀림 지대로 여기서 이어지는 울창한 숲을 백두산록의 처녀 원시림 지대라고 한다.

하천은 남쪽 산록에서 모여든 물줄기가 서안동 양수관(兩水關)에서 합쳐 구운수(九雲水)가 되며, 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석포천(石浦川)이 사지동에서 이와 합쳐 연면수의 본류가 되어 북쪽의 연상 · 서하 두 면을 거쳐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농산물로는 조 · 귀리 · 수수 · 옥수수 · 콩 등이 생산되며, 특히 산간 마을의 화전 농가에서 생산되는 감자는 크기나 맛이 뛰어나며, 이 감자로 인하여 이곳은 녹말 산지로도 이름이 높다.

처녀 원시림 지대에서 벌채된 원목은 지난날 뗏목으로 두만강 하류까지 운반되었으나, 지금은 철도를 이용, 길주나 성진 방면으로 수송된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사지(四芝) · 신장(新章) · 수침(水砧) · 석포(石浦) · 서안(栖安) · 광양(廣陽) 등 6개 동이 있다.

연상면(延上面)

군의 북부 중앙에 있는 면. 면적 249.49㎢, 인구 4,426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상창동이다. 북쪽 경계에는 독소령이 있고, 동남쪽 경계에는 검덕산이 솟아 있다.

하천은 연면수의 하류가 연사면을 통하여 이 면의 서남부를 뚫고 들어와 북류하다가 서하면으로 흘러가며, 동쪽 어하면에서 들어온 죽림천이 면의 중앙을 동서로 흘러 상창동에서 연면수와 합쳐진다.

농산물로는 조 · 수수 · 옥수수 · 콩 · 강낭콩 · 감자 등이 많이 생산된다. 가축으로는 목재 운반용 역우(役牛)로 소의 사육이 많다.

면내 대부분이 산악 지대로 수림이 울창한데, 저지대는 이깔나무 · 소나무 · 잣나무 · 전나무 등 침엽수와 박달나무 · 자작나무 · 사시나무 등 활엽수의 혼성림을 이루며, 고지대는 평균 수령 150년에 크기 30m 내외의 이깔나무 원시림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 벌채되는 원목은 한때 상창동 계벌장에서 뗏목으로 묶여 연면수로 하류까지 흘려 보내졌으나, 백무선이 개통된 뒤로는 채벌장에서 집하장까지만 뗏목으로 운반되고 그 다음은 철도에 의하여 길주 · 성진 방면으로 수송된다.

교통은 산업철도인 백무선이 연면수 유역을 따라 면의 서남부를 통과한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교가 있다. 상창(上倉) · 박천(朴川) · 문암(文巖) · 연수(延水) 등 4개 동이 있다.

영북면(永北面)

군의 동북부 두만강변에 있는 면. 면적 125.10㎢, 인구 4,216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지초동이다. 동쪽에 서현령(西峴嶺, 985m)과 지초령(芝草嶺, 862m)이 있고 남쪽 경계에 민사봉이 솟아 있으며, 이를 여맥이 두만강을 향하여 북으로 낮은 구릉 지대를 이루다가 강 안 가까이 와서 사라진다. 하천은 동남쪽 산록에서 발원하여 두만강으로 북류하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모두 작은 지류에 불과하다.

면의 서쪽을 흐르는 두만강의 유로(流路)는 편마암 지대에 속하며, 노덕동 부근은 가장 심한 감입곡류 현상(嵌入曲流現象)을 나타내는데 강의 구부러지는 목 부분의 양측 거리가 불과 1,500m 내외이고 그 안쪽 거리는 1㎞ 정도이며 강 안의 높이는 50m에 달하는바, 곡류 절단 현상(曲流切斷現象)이 일어난 특수 지대로 알려져 있다.

농산물로는 조 · 보리 · 귀리 · 수수 · 옥수수 · 콩 · 강낭콩 · 감자 등이 많이 생산되며, 특히 감자는 품질이 우수하여 전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 유축농업이 성하여 소 · 돼지 · 닭 등이 사육되며, 부업으로 누에치기와 양봉을 하는 농가도 적지 않다.

동남쪽의 산간지대는 소나무 · 이깔나무 등 침엽수와 박달나무 · 사시나무 · 자작나무 · 황병나무 등 활엽수의 혼성림이 울창하다. 이곳의 임목은 주로 탄광용 갱목이나 조선재(造船材) 또는 펄프의 원료로 공급되며, 잡목과 지엽(枝葉)은 목탄 원료와 땔감으로 쓰인다. 한편, 송이버섯은 이곳 명물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교통은 두만강변을 따라 회령방면을 연결하는 국경 도로가 뻗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교가 있다. 지초(芝草) · 노덕(鹵德) · 양영(梁永) · 서호(西湖) 등 4개 동이 있다.

풍계면(風溪面)

군의 최동북단 두만강변에 있는 면. 면적 348.58㎢, 인구 3,814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명선동이다. 동쪽의 경계에는 노전항령(蘆田項嶺)과 구절령(九折嶺)이 가로놓여 있고, 서쪽 경계에는 서현령(西峴嶺, 985m)이 있으며, 남쪽 경계에는 민사봉과 가라대봉(加羅大峰, 1,430m)이 솟아 있다.

중앙 북쪽에는 용두산(龍頭山, 1,078m)이 있으며, 남동부 역시 험준한 산악 지대를 이룬다. 하천으로는 가라대봉 기슭에서 발원한 송학천(松鶴川)이 면의 중앙을 남에서 북으로 흘러 들어가, 그 하류 지방은 평탄하여 농경지로 적합하다.

면의 북쪽을 흐르는 두만강 유역은 편마암 지대로 상류의 영북면을 벗어난 계상 · 계하 2개의 동에 걸친 유로가 꼬불꼬불한 감입곡류현상을 일으킨다.

농산물로는 송학천 하류 지방에서 약간의 쌀이 생산되며, 그 밖의 지역에서는 주로 조 · 피 · 보리 · 귀리 · 기장 · 수수 · 옥수수 · 콩 · 강낭콩 · 감자 등이 생산된다. 축산업이 성하여 소 · 돼지 · 닭 등이 사육된다.

동남쪽의 산악 지대는 이깔나무 · 소나무 등의 침엽수와 박달나무 · 자작나무 · 사시나무 · 물박달나무 등 활엽수의 울창한 혼성림을 이룬다.

이곳에서 벌채되는 임목은 용재나 광산용 갱목으로 이용되는데, 목재의 집산지로 이름난 회령으로 반출되는 한편, 잡목은 현지에서 목탄으로 제조되어 도시 지역으로 공급된다.

교통은 두만강을 끼고 국경 도로가 뻗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명신(明臣) · 계상(溪上) · 계하(溪下) · 송학(松鶴) · 용천(龍川) 등 5개 동이 있다.

광복 후 변천

1952년 12월 행정구역 개편 때 연사면 · 삼장면의 일부가 신설된 연사군으로 이관되었으며, 1953년 12월에는 연사군 삼하리의 일부가 임강리로 편입되었다.

1954년 10월 삼장리가 연사군으로 이관되고, 1961년 3월에는 창렬리가 창렬노동자구로, 마양리가 마양노동자구로 개칭되었다. 1977년 11월 청진직할시에 편입되었다가 1985년 다시 함경북도로 편입되었으며, 1992년 10월에는 남산 및 삼봉노동자구가 신설되었다.

군의 동쪽은 회령시와 부령군, 서쪽은 연사군, 남쪽은 경성군, 북쪽은 두만강을 경계로 중국과 접하여 있다. 동경 129°01′∼129°35′, 북위 41°50′∼42°26′에 위치하며, 면적은 1,300㎢, 인구는 11만여 명이다(1996년 현재).

행정구역은 무산읍과 창렬(彰烈) · 강선(降仙) · 마양(馬養) · 남산(南山) · 삼봉(三峰) · 주초 등 6개 노동자구, 서호(西湖) · 지초(芝草) · 새골 · 칠성(七星) · 독소(篤所) · 풍산(豊山) · 차유(車踰) · 오봉(五峰) · 허언(虛彦) · 온천(溫泉) · 박천(朴川) · 상창(上倉) · 문암(文岩) · 홍암(興岩) · 임강(臨江) 등 15개 이로 되어 있으며, 군 소재지는 무산읍이다.

이 군은 함경산맥의 북서쪽에 펼쳐진 백무고원의 일부로서, 대부분의 지역이 1,000m 이상의 중상성 산지로 되어 있다. 지세는 남동부에서 두만강 연안으로 가면서 점차 낮아진다.

함경산맥이 뻗어 있는 동남부 경계에는 삼각산(1,449m) · 고성산(1,754m) · 대련골산(1,549m) · 곤봉산(1,925m) · 도정산(2,199m) 등의 높은 산들이 솟아 있고, 그 밖의 지역에도 가라지봉(1,418m) · 민봉(1,670m) · 마양산(1,304m) · 검덕산(1,899m) · 명장산(1,788m) · 삼복산(1,329m) 등이 솟아 있다.

두만강이 북쪽 경계를 흐르며, 그 지류인 성천수 · 연면수가 군내를 흐른다. 성천수 상류에는 전력 생산, 유벌, 담수 양어장 등으로 이용되는 마양저수지가 있다.

기반암은 화강암이 대부분이며, 결정편마암 · 편마암 · 현무암 등도 분포되어 있다. 토양은 대부분이 갈색산림토 · 충적토로 되어 있으며, 수십억t의 자철광이 묻혀 있다.

기온은 연평균 5.1℃, 1월 평균 ·13.3℃, 8월 평균 20.8℃이며, 첫서리는 9월 28일, 마감서리는 5월 9일경에 내린다. 연평균 강우량은 529㎜이다. 산림은 군 면적의 87.5%로서, 주요 수종은 삼송류와 사스레나무 · 황철나무 · 자작나무 · 참나무 등이다.

이 군의 기본 산업은 농업과 축산업이다. 농경지는 군 넓이의 12.5%이며, 그중 밭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주요 작물은 옥수수 · 감자 · 콩 · 밀 · 보리 등이고, 배추 · 무 · 호박 · 참외 · 고추 같은 채소류도 재배되고 있다.

공예작물로는 사탕무 · 아마 · 담배를 재배하고 있으며, 그중 담배는 품질이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넓은 방목지를 이용하여 소 · 양 · 돼지 · 토끼 등이 사육되고 있으며, 연 1천만 개의 계란을 생산하는 무산닭공장이 있다. 또한, 밀원식물이 풍부하여 꿀벌도 많이 치고 있다.

이 군의 주산업은 광산 채굴업과 임산업이다. 무산광산을 중심으로 생산되는 철광은 북한 총생산량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이곳에서 채굴된 철광은 철도와 무산 · 청진 간의 98㎞ 대형 수송 도관을 통하여 운반된다.

이 군은 주요한 원목 생산 및 목재 가공 중심지의 하나로서, 임업기계공장 · 연상임산사업소 · 마양합판원목사업소 · 무산제재공장 등이 있으며, 생산된 원목은 일반 용재 · 펄프 용재 · 갱목으로 주로 쓰인다.

그 밖에 식료 · 직조 · 농기구 등을 생산하는 지방 공장들이 있다. 철도는 무산선(고무산∼무산)과 백무선(백암∼무산)이 지나가며, 청진 · 회령 · 연사 등지로 통하는 도로가 있다.

유적으로는 무산읍에 무산범의 구석원시유적이 있다. 1959년에 발굴된 것으로 출토 면적은 4만㎢이며, 원시인이 살던 주거지 · 연장 · 질그릇 등이 출토되었다.

그 밖에 요새 · 성터 · 봉수대 등이 남아 있다. 교육 · 문화 기관으로는 공장 대학인 무산공업대학과 무산고등중학교를 비롯한 각급학교가 있으며, 도서관 · 영화관 · 문화 회관 등이 있다.

참고문헌

『무산군읍지』(1899)
『함북대관』(정문사, 1967)
『함경북도지』(함경북도지편찬위원회, 1970)
『이북5도30년사』(이북5도위원회, 1981)
『무산군지』(무산군지편찬위원회, 1984)
『북한문화재실태와 현황』(문화재관리국, 1985)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집필자
조동규·이호관·김성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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