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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
개념
인간의 육체를 표현매체로 삼아 사상 · 감정 · 감각 · 정서 등을 율동적으로 표출하는 예술행위. 무용.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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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인간의 육체를 표현매체로 삼아 사상 · 감정 · 감각 · 정서 등을 율동적으로 표출하는 예술행위. 무용.
내용

일반적으로 무용은 무용의 동기와 목적에 따라 예술무용·교육무용·오락무용·유희무용·체육무용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밖에 무용의 형태와 내용·형식·체계·해석·정서·시대·지역 등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된다.

한국무용이란 역사 이래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생성되고 전승되어온 무용 일체를 가리키며, 이밖에 한국적 미형식을 바탕으로 한 현대의 창작무용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연행(演行)되는 무용의 범주는 근대 이전에 연원을 둔 전통무용과 근대 이후 전통무용에 바탕을 두고 새롭게 전개된 신무용, 서양의 기법에 바탕을 둔 현대무용 등이 주를 이루며, 이밖에 우리 나라의 대학교육에서 수용하고 있는 발레 등을 함께 아우른다.

  • 무용사 -
  1. 상고시대의 무용

부족사회를 형성하고 있던 시대의 춤과 음악은 농사일과 관련된 하늘과 신에게 감사드리는 집단적인 행사에서 아직 분화되지 않은 소박한 가무(歌舞) 형태로 연행되었다.

농사일과 관련된 집단적인 행사란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舞天)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온 부족민이 모여 천신(天神)을 섬기고 큰 잔치를 벌이는 부족의 중대한 연중행사였다.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이 집단행사에서는 며칠씩 음주가무(飮酒歌舞)가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와 같은 연중행사에서의 가무음주가 마한에서는 일년에 두 차례(5월 파종기와 10월 추수기) 있었다고 전한다.

한편,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옛날 웅천(熊川 : 지금의 공주)지방에는 4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웅산신당(熊山神堂)으로부터 신을 맞아 산 아래에 모셔놓고 종고잡희(鐘鼓雜戱)로써 신을 받드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제사 때가 되면 원근의 마을사람들이 다투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웅천의 풍속은 옛날 삼한시대의 연중행사를 상기시켜주는 것이며, 오늘날 행하여지고 있는 5월 별신굿이라든지 10월 상달에 거행되는 각 지방의 도당굿과의 상관관계를 암시하여준다.

즉,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여 볼 때 상고시대의 무용은 춤과 음악, 제의(祭儀) 등이 한데 얽혀 있는 하나의 종합연출형태로서 춤의 원초적인 시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삼국시대의 무용

〔고구려〕

고구려 무용에 관한 내용은 지금까지 발굴된 고분벽화와 ≪삼국사기≫ 등 몇 가지 문헌에 전하는 단편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삼국사기≫ 악지에 소개된 고구려의 무용은 악기 연주자들의 반주에 맞추어 4명의 무용수가 둘씩 짝을 지어 추는 것으로서 무용수와 악사들의 복식이 서로 다르다.

즉, 악공들은 붉은 비단모자에 새 깃털로 장식을 하였고 저고리는 노란색 긴소매와 자주빛 비단띠를 갖추었으며, 아랫도리는 통이 아주 넓은 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붉은색 가죽신에 오색끈을 달아 신었다.

그런가 하면 4명의 무용수들은 모두 머리를 뒤로 묶고 붉은 빛깔의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여기에 금실로 장식을 하였다. 그리고 짝을 이루는 2명의 무용수는 끈이 길게 내려오는 저고리〔裙袖〕에 붉은 바지를 입고 다른 2명의 무용수는 붉고 노란 빛깔의 저고리에 바지를 입었는데, 모두 긴소매를 착용하였으며 검은색 가죽신〔烏皮靴〕을 신었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중국의 역사서인 ≪구당서≫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고구려 고분벽화 중의 통구 무용총 무악도(舞樂圖)에 나타나는 고구려 춤의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 즉, 양자의 내용을 비교하면 연주자와 무용수의 복식 및 4명의 무용수가 짝을 이루어 춤을 춘다는 점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위와 같은 문헌내용과 고분벽화로 알 수 있는 고구려 무용의 특징은, 오늘날 한삼의 구실과 비교할 수 있는 긴소매 저고리를 입고 어깨를 으쓱이며 엉덩이를 뒤로 약간 내민 채 추는 것으로 집약할 수 있다.

한편, 황해도 안악고분의 후실벽화에는 코가 큰 무용수가 다리를 ‘X’자모양으로 꼬고 손뼉을 치며 춤추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것은 무용수의 외모라든지 춤사위, 반주악기 등으로 보아 서역에서 전래된 당시의 외래무용이라고 판단된다.

이와 같은 춤 이외에도 고구려의 여러 고분벽화에는 다양한 춤과 재예(才藝)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어 당시의 춤문화를 간접적으로 시사하여준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통구제12호고분·고산리제10호고분의 춤그림 및 팔청리고분, 미천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벽화의 칼춤그림, 팔청리·약수리·수산리벽화의 갖가지 기예그림 등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다양한 기예들은 조선시대까지 전승되는 백희가무(百戱歌舞)의 전통을 설명하여주는 자료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백 제〕

백제의 무용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자료는 너무도 소략하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기록에 의하면 백제의 춤문화가 고구려나 신라에 비하여 그리 뒤쳐져 있던 것 같지는 않지만, 이를 뒷받침해줄만한 근거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중국문헌인 ≪통전≫을 인용한 ≪삼국사기≫ 악지에서는 무용수 2명의 복식에 관하여 언급하였을 뿐이다. 즉, 백제의 무용수들은 붉은 빛깔의 긴소매가 달린 치마 저고리를 입고 머리에는 장보관(章甫冠)을 쓰며 가죽신〔皮履〕을 신었다는 것이다.

이 복식 기록만으로 볼 때 백제의 무용수가 장보관을 썼다거나 발목이 짧은 ‘이(履)’계통의 신을 신었다는 점(고구려의 무용수들은 발목이 많이 올라오는 ‘靴’를 신었다.)에서 춤의 계통이 고구려와 다른 것임을 짐작하여 볼 수 있다.

한편, 백제의 춤과 관련하여 매우 주목을 끄는 점은 〈기악무 伎樂舞〉에 관한 기록이다. ≪일본서기 日本書紀≫에 의하면 7세기초 백제인 미마지(味摩之)가 오(吳)나라로부터 〈기악무〉를 배워 일본에 전하였다 하였고, 이 춤의 전승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기악무는 일본의 여러 사찰을 중심으로 연행되어왔기 때문에 이 춤에 사용되던 가면이 나라(奈良)의 도다이사(東大寺)에 전하고 있고, 13세기경에 편찬된 고마치카자네(狛近眞)의 ≪교훈초 敎訓抄≫에는 〈기악무〉의 각 과장이 설명되어 있어 백제춤의 색다른 면모를 알 수 있게 한다.

이상의 기록 및 이혜구(李惠求)의 〈산대극과 기악〉이라는 연구결과에 의하면, 백제인 미마지가 일본에 전한 〈기악무〉는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양주산대도감〉·〈봉산탈춤〉과 같이 탈춤형태로 된 춤으로서 본래는 불교의 포교를 목적으로 한 내용이 주종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에서는 본래의 형태와 내용으로 전승되다가 몇 가지는 기록 및 〈기악무〉에 사용된 가면만을 남긴 채 전승이 끊겼고, 한국에서는 기록과 실물자료는 없으나 춤의 내용이 많은 시대적 변모를 겪어가면서 오늘의 탈춤으로 전하고 있다.

〔신 라〕

신라의 무용은 가야금과 노래연주와 함께 연출된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일반 백성들이 생활 속에서 집단적으로 참여하는 가무(歌舞)와 무격의식(巫覡儀式)과 관련된 춤문화가 매우 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신라시대는 백희가무의 형태를 띤 기예도 적지 않게 연행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삼국 가운데 춤문화에 대한 기록이 가장 많은 셈이다.

물론, 이와 같은 춤문화가 신라의 독자적인 특징이라기보다 기록의 정도 차이라고 볼 때, 금(琴 : 거문고나 가야금)·가(歌)의 반주에 맞추어 추는 춤의 형태라든지 민간에서의 집단적인 가무형태, 백희가무와 같은 기예의 형태, 무격의식과 관련된 춤의 형태는 삼국 모두가 누리고 있었던 공통적인 문화였으리라고 짐작하여 볼 수 있다.

≪삼국사기≫ 악지에 의하면 가야의 악사였던 우륵(于勒)이 신라로 망명하면서 금·가·무의 연출형태를 신라에 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552년(진흥왕 13) 신라로 망명한 우륵은 신라의 세 젊은이 계고(階古)·법지(法知)·만덕(萬德)에게 각각 가야금과 노래와 춤을 가르쳤으며, 이것이 뒤에 신라의 궁중연악〔宮中大樂〕으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금·가·무의 연출형태는 통일신라로 전승되었으며 중국·일본 등과의 교류에서도 신라를 대표하였다.

한편, 백성들의 집단가무 형태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으로는 제3대 유리이사금 시대 〈도솔가〉에 관한 것과 한가윗날의 〈회소악〉과 관련된 것, ≪삼국사기≫에서 향인(鄕人)들이 즐겼다고 하는 여러가지 악곡이름 등을 들 수 있으나, 구체적인 춤의 내용에 대하여는 알 수 없다.

이 중에서도 〈덕사내 德思內〉·〈석남사내 石南思內〉·〈내지 內知〉·〈백실 白實〉·〈사중 祀衆〉 등은 무격의식과 관련된 것으로 추측되며, 이 춤들은 물론 춤과 음악이 함께 수반되었으리라고 본다.

이밖에 가야의 악사 우륵이 지은 작품 12곡 중 공던지는 기예의 일종인 〈보기 寶伎〉가 있는데 이것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행하여졌다는 〈농주 弄珠〉,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 중에 나오는 〈금환 金丸〉과 맥이 통하는 곡예의 일종으로서 신라에서의 백희가무 연행의 가능성을 암시하여준다.

또한, 우륵 12곡 가운데 〈사자기 獅子伎〉는 최치원의 ≪향악잡영≫ 중 〈산예 狻猊〉와 관련 있는 것으로서, 최치원의 시에서 “서역에서 유사(流沙) 건너 만리길을 오느라고 털이 모두 떨어지고 먼지까지 묻었구나…….”라고 읊은 바와 같이, 이 춤은 서역지방에서 전래한 무악(舞樂)의 일종이라고 해석된다.

  1. 통일신라시대의 무용

통일신라시대는 삼국시대의 춤문화를 계승하고 새롭게 전개되기 시작한 당나라와의 교류로 인하여 이전시대보다 훨씬 다채로운 춤문화를 형성하였을 것이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자료는 그리 충분하지 못하다.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는 이전시대와 마찬가지로 금·가·무에 의한 연출형태가 많았으며, 〈무애무 無㝵舞〉·〈처용무 處容舞〉·〈상염무 霜髥舞〉등 독자적인 춤이름과 구체적인 구성을 가진 춤이 등장함으로써 춤의 영역이 전문화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또한, 통일신라기는 국선(國仙)들이 중심이 되어 천령명산대천(天靈名山大川)과 용신(龍神)을 섬기던 팔관회(八關會)가 본격적으로 행하여지기 시작하였으므로, 팔관회와 관련된 무격의식에 따른 춤과 백희가무도 이 시대의 중요한 춤문화로 등장하였다. 이밖에도 백성들 사이에서 연행된 집단적인 가무와 기예 역시 꾸준히 지속되었음은 물론이다.

≪삼국사기≫ 악지 신라악조에 의하면 신라의 무용수들은 방각복두(放角幞頭)·자대수(紫大袖)·공란홍정(公襴紅鞓)·도금요대(鍍金腰帶)·오피화(烏皮靴)를 착용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 중 자대수를 착용하는 점은 백제무용수와 같고 오피화를 신었던 점은 고구려무용수와 같다.

그리고 여기에서 신라의 무용수들이 방각복두를 착용하였다는 것은 664년(문무왕 4) 당나라의 제도에 따라 부인의 의복제도를 혁신한 사실과 관련지어 볼 때 당나라의 의복제도를 무용에 응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807년(애장왕 8)에 연출된 여러가지 춤은 이상과 같은 무용수의 복식과 다른 점이 많다. 즉, 〈사내금무 思內琴舞〉의 경우 무용수는 청의(靑衣), 가야금 연주자(琴尺)는 적의(赤衣), 노래부르는 이(歌尺)는 채의(彩衣)에 수선(繡扇)을 들고 금루대(錦縷帶)를 매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러한 여러가지 춤은 춤의 제목에 따라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춤문화가 매우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삼국사기≫ 신문왕 9년조에는 신촌에서 큰 춤판이 벌어졌다는 기록과 함께 춤의 목록과 반주형태를 비교적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 연행된 춤들은 그 반주형태에 따라, ① 가(歌)반주에 의한 것, ② 가야금과 노래반주에 의한 것, ③ 가야금반주에 의한 것으로 구분된다.

이밖에 통일신라기는 648년 15세 소년 능안(能安)이 국원 땅에서 추었다는 〈가야지무 伽倻之舞〉, 원효(元曉)가 불교포교를 위하여 호리병을 들고 다니면서 추었다는 〈무애무〉, 헌강왕 때의 처용설화에서 비롯한 〈처용무〉, 헌강왕이 경주 포석정에 행차하였을 때 남산의 신(神)이 임금 앞에 나타나서 추었다는 〈상염무〉 등의 춤이름이 간단한 고사(故事)와 함께 전하고 있어, 이 시대에 이르러서 무용이 어떤 줄거리를 가지고 독자적인 표현력을 갖추기 시작함으로써 점차 전문화되는 경향으로 해석된다.

이 중에서도 〈무애무〉나 〈처용무〉는 고려시대를 거쳐 오늘까지 전승되는 것(무애무는 춤내용이 불교적이라는 이유로 조선조에 한동안 단절되었다가 순조 때에 재연되어 오늘에 전하고 있다.)으로서 통일신라에 연원을 둔 중요한 레퍼터리로 자리잡고 있다.

한편, 통일신라기의 무용에서 주목되는 것은 최치원이 지은 〈향악잡영〉 5수이다. 이 시는 당시 향악(鄕樂)이라고 불리던 다섯가지의 춤, 즉 〈금환〉·〈월전 月顚〉·〈대면 大面〉·〈속독 束毒〉·〈산예〉를 시의 소재로 삼은 것으로서 춤의 형태와 내용에 대하여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에 관한 몇 가지 연구결과에 의하면 〈금환〉은 4, 5세기 무렵의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공던지는 기예의 일종이며, 〈대면〉은 황금빛탈을 쓰고 추는 춤, 〈속독〉은 남빛탈을 쓰고 추는 춤, 〈산예〉는 사자탈을 쓰고 추는 춤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월전〉과 〈대면〉·〈속독〉은 전하지 않으나 〈산예〉의 경우 현행의 여러가지 탈춤의 〈사자춤〉 과정에서 그 편린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이와 같은 연희내용은 백제인 미마지가 일본에 전하여 주었다는 〈기악무〉와 그 연맥을 같이한다고 본다.

  1. 고려시대의 무용

고려시대는 통일신라의 전통적인 춤과 음악을 이어받은 한편, 통일신라 이래의 팔관회 유풍과 부처를 섬기는 연등회(燃燈會)가 국가의 중요한 의식으로 자리잡게 됨으로써 이에 따르는 각종 백희가무의 풍습이 고려시대의 중요한 춤문화를 형성하였다.

또한, 고려시대는 송나라로부터 새로운 형태의 춤이 들어와 고려시대의 춤으로 정착하게 됨에 따라 궁중을 중심으로 한 무용계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즉, 고려시대는 문종 때 처음으로 송나라의 무용을 전해받아 여러가지 연향 및 팔관회, 연등회와 같은 국가의식에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전통적인 춤과 송나라에서 새로이 전래한 춤을 구분하기 위한 새로운 개념이 생겼던 것이다.

이것은 음악의 경우도 마찬가지로서 중국계 음악을 당악(唐樂)이라 하였고 고려 이전시대로부터 전승된 전통음악을 향악(鄕樂)이라 부르게 된 것같이, 춤도 역시 중국에서 전래한 춤은 당악정재(唐樂呈才)라 하였고 전통적인 춤을 향악정재(鄕樂呈才)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밖에도 고려시대는 유교의식에 쓰이는 음악과 춤이 전래되면서 일무(佾舞)라는 새로운 형태의 춤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 춤은 고려 중기 이후 조선조로 계승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이와 같은 고려시대의 여러가지 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향악정재와 당악정재, 그리고 팔관회·연등회에서 연행된 백희가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들 춤의 종류와 그 특징을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1) 향악정재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향악정재는 ≪고려사≫ 악지에 전하는 〈무고 舞鼓〉·〈동동 動動〉·〈무애 無㝵〉이다.

≪고려사≫ 악지에 의하면 〈무고〉는 반룡(蟠龍)을 그린 북을 두드리며 〈정읍사 井邑詞〉를 노래하는 화려하고 장쾌한 춤이며, 〈동동〉은 상아(象牙)로 만든 작은 박(牙拍)을 두 손에 하나씩 들고 ‘착착’ 소리를 내며 추는 춤으로서, 이 춤에는 축수(祝壽)의 뜻과 12월사(十二月詞)를 노래하는 〈동동사 動動詞〉를 곁들인다(고려 이후 조선조에서는 아박무라는 이름으로 전승된다.).

그리고 〈무애무〉는 신라시대의 원효와 관련된 고사를 가진 춤이 고려시대의 향악정재로 정착된 것으로, 바가지 들고 불가어(佛家語)로 된 노래를 부르며 추는 춤이다.

고려에서 불교가 융성하였던 만큼 〈무애무〉는 매우 성하게 연행되었으나, 조선조 세종 16년 연행이 금지되었고 조선 후기 순조대에 와서야 재현될 수 있었다. 오늘날은 순조대에 재현된 것이 전승되고 있다.

이상과 같은 고려시대 향약정재는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당악정재와 향악정재의 차이점에서와 같이 당악정재에 비하여 단순한 구성을 가지고 있으며, 향악정재의 형성시기가 당악정재의 전래보다 늦은 점에 비추어볼 때 당악정재의 형식을 참작하고 고려의 전통무용을 주제로 하여 새롭게 탄생시킨 ‘고려형식의 정재’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점은 신라 이래로 전승되고 있던 〈처용무〉라든지 여타의 전통무용을 향악정재라고 소개하지 않은 데서도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즉, 〈처용무〉는 고려시대의 나례의식(儺禮儀式)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던 춤으로서, 고려시대는 한 사람의 무용수가 흑포사모(黑布紗帽)를 쓰고 추는 일인무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고려 후기의 문인 이제현(李齊賢)의 〈관나희 觀儺戱〉에 의하면 이 〈처용무〉가 고려시대의 비중 있는 전래 전통무용이었음을 알 수 있고, 조선조에서는 이 춤이 〈오방처용무〉로 개작되어 향악정재로 불렸던 것과 비교하여보면, 고려시대에 사용된 향악정재의 의미가 조금 더 좁은 뜻으로 쓰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당악정재 고려시대의 당악정재는 ≪고려사≫ 악지에 〈헌선도 獻仙桃〉·〈수연장 壽延長〉·〈오양선 五羊仙〉·〈포구락 抛毬樂〉·〈연화대 蓮花臺〉 등이 전한다. 이밖에도 ≪고려사≫에는 당악정재 수용 초기에 연행되다가 전승이 끊긴 몇 가지의 춤 (구장기별기·답사행가무 등)의 이름이 전하고 있다.

당악정재가 고려에 처음 들어온 것은 1073년(문종 27) 2월이다. ≪고려사≫ 권25에 보면 “문종 27년 2월 을해에 교방여제자(敎坊女弟子) 진경(眞卿) 등 13인이 연등회에 〈답사행가무〉를 쓸 것을 아뢰어 임금이 허락하였다. 11월 신해에는 팔관회를 베풀고 임금이 신봉루(神鳳樓)에 나아가 악(樂)을 보았는데 교방여제자 초영(楚英)이 새로 전해온 〈포구락〉과 〈구장기별기〉를 아뢰었다. 〈포구락〉 여제자는 13명이고 〈구장기별기〉 여제자는 10인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당악정재 수용 초기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또한, “문종 31년 2월 을미의 연등회 때는 임금이 중광전(重光殿)에 나아가서 악(樂)을 보았는데 교방여제자 초영이 〈왕모대가무 王母隊歌舞〉를 아뢰었는데 〈왕모대가무〉의 일대(一隊)는 55인이고 춤은 ‘군왕만세(君王萬歲)’, ‘천하태평(天下太平)’의 글자를 만드는 것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같이, 당악정재는 주로 문종대에 수용되기 시작하였고, 당시의 기록을 보면 당악정재 수용 초기는 직접 중국의 음악인과 무용수에 의하여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문종 30년 국가의 장악(掌樂)기관인 대악관현방(大樂管絃坊)을 제정하였는데 이 제도에는 각종 당악기를 연주하는 중국인 연주자(唐樂師)와 더불어 당무업사 겸 창사업사(唐舞業師兼唱詞業師)·당무업사(唐舞業師) 등 중국인 무용수가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국내의 연주자이나 무용수에 비하여 높은 수준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한편, ≪고려사≫ 악지에 전하는 다섯 가지의 정재는 모두 고유한 줄거리를 가지고 엄격한 형식에 의하여 연출되는 대규모의 춤으로서 모두 조선조로 전승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춤의 내용과 구성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3) 향악정재와 당악정재의 차이점 고려시대는 당악정재가 수용된 지 얼마되지 않은 때이고 이에 자극받아 새롭게 다듬어진 향악정재도 본래의 영역을 고유, 간직하게 됨으로써 두가지 춤의 특징이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다.

향악정재와 당악정재는 무용수들의 입장과 퇴장, 춤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구호(口呼), 치어(致語)의 유무(有無), 창사의 내용 등에 있어서 몇 가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향악정재와 당악정재가 가지고 있던 고유한 차이점이며, 동시에 이러한 특징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던 고려시대 향악정재와 당악정재의 특징이기도 하다. 양자의 차이점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표〕와 같다.

(4) 일 무 아악(雅樂)에 따르는 춤으로서 열(列)을 지어 추는 춤이다. 일무의 종류는 그 열의 수에 따라 8일무·6일무·4일무·2일무로 나누어지는데, 고려시대 송나라로부터 전래된 일무는 6일무였다. 6일무는 48인이 한 조를 이루는 것과 36인이 한 조를 이루는 것의 2종이 있다.

1116년(예종 11)에 들어온 6일무는 36인이 추는 6일무였다. 물론, 이 춤은 문무(文舞)와 무무(武舞)로 구분된 것으로서, 문무는 약(籥)과 적(翟)을, 무무는 간(干)과 과(戈)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일무는 6일무의 수라든지 문무와 무무에 따르는 약간의 변천을 겪으면서 조선조로 계승되어 조선조 일무의 근간이 되었다.

(5) 백희가무 고려시대의 백희가무는 주로 팔관회와 연등회, 나례 등 국가의 중요한 의식과 함께 연행되었다. ≪고려사≫ 태조 원년조에 의하면 팔관회에서 백희가무를 연출하였는데, 이것은 사선악부(四仙樂部)에 나오는 용·봉황·코끼리·말·수레·배 등으로 모두 신라 때의 예일을 춤과 놀이로 꾸민 것이라 하여 백희가무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백희가무는 좁은 의미보다는 팔관회와 연등회, 나례 등에서 연출되는 여러가지 기예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고려시대에 연행된 것으로는 〈칼삼키기〉·〈불토하기〉·〈솟대장이〉·〈줄광대〉·〈꼭두각시놀음〉·〈동물춤〉·〈서역·호인(胡人)들의 놀이〉 등이 있었다.

이밖에 고려시대의 춤으로 민간의 뭇 백성들 사이에서 전승된 춤이 있을 것이나 현재로서는 자료의 미비로 언급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1. 조선시대의 무용

≪악학궤범≫ 및 여러가지 의궤(儀軌), 문헌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조선시대의 춤문화는 대개 고려에서 이어진 향악정재와 당악정재의 전통과 일무, 나례나 그밖의 행사에서 연행된 잡희(雜戱) 등으로서 문화의 기본골격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조에 들어와서 향악정재와 당악정재의 형식에 의하여 새로운 춤이 창작되고 전승되는 과정에서 조선조의 춤 문화는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조에 새롭게 창작된 궁중정재의 경우 향악정재와 당악정재를 구분하고 있던 엄격한 틀이 점점 희미해짐에 따라, 조선 중기 이후로는 향악정재와 당악정재의 개념에도 상당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이상과 같은 조선조의 춤의 역사를 향악정재와 당악정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향악정재 ≪악학궤범≫에 무보(舞譜)를 전하는 조선 초기의 향악정재로는 고려시대로부터 전승된 〈무고〉, 〈아박〉 및 조선조에 새로이 창작된 〈보태평 保太平〉·〈정대업 定大業〉·〈봉래의 鳳來儀〉·〈향발 響鈸〉·〈학무 鶴舞〉·〈학 연화대 처용무 합설 鶴蓮花臺處容舞合設〉·〈교방가요 敎坊歌謠〉·〈문덕곡 文德曲〉 등 여덟 가지이다.

이 중 〈처용무〉는 고려시대 한 사람이 추던 일인무에서 〈오방처용무〉로 확대된 것이고, 〈보태평〉 이하 7곡은 조선조에 들어와서 새로이 창작된 춤이다. 특히, 〈보태평〉과 〈정대업〉은 세종 29년 회례악으로 창작된 것이나 세조 10년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으로 채택되어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보태평〉과 〈정대업〉은 모두 6일무로 되어 있으며, 〈보태평〉에는 선대의 문덕을 기리는 문무가 따르고 〈정대업〉에는 무덕을 기리는 무무가 따른다.

조선 중기에 해당하는 숙종조에는 〈광수무 廣袖舞〉가, 영조조에는 〈공막무 公莫舞〉가 창작되어 연행되었고, 순조 이후로는 여러가지 향악정재가 다채롭게 창작되는 한편, 그동안 전승이 끊겼던 춤이 재연됨으로써 가히 향악정재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오늘날 전하고 있는 궁중정재의 전통도 바로 순조 이후 조선 말기의 향악정재와 긴밀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때 창작된 향악정재는 〈가인전목단〉·〈검기무〉·〈무산향〉·〈춘앵전〉 등 22가지이며 재연된 춤으로는 고려시대의 〈무애〉 등이 있다.

한편, 고종 때의 기록에 의하면 궁중 이외의 민간무용이 궁중에 수용되는 과정을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평안남도 성천지방의 〈사자무〉와 평안북도 선천지방의 〈항장무 項莊舞〉 등이 있다.

(2) 당악정재 ≪악학궤범≫에 전하는 조선조의 당악정재는 모두 14가지이다. 이 중 고려시대로부터 전승된 〈헌선도〉·〈오양선〉·〈수연장〉·〈포구락〉·〈연화대〉등과 조선초에 새로이 창작된 〈금척 金尺〉·〈수보록 受寶籙〉·〈근천정 覲天庭〉 등 일곱가지, 그리고 조선초 새로이 재연된 〈육화대 六花隊〉·〈곡파 曲破〉 등이 포함된다.

조선 초기에 창작된 당악정재는 물론, 당악정재의 형식에 맞춘 것으로서 반주까지도 당악을 사용하는 등 기존의 당악정재 개념에 충실한 것이었다.

이에 비하여 조선조 말기 순조 이후에 창작된 당악정재는 많은 변화를 보인다. 즉, 순조 무렵 향악정재가 많이 창작된 것처럼 당악정재에도 몇 가지 새로운 작품이 선보이는데, 〈연백복지무 演百福之舞〉·〈장생보연지무 長生寶宴之舞〉 등 네 가지 당악정재를 보면 춤의 입·퇴장에 죽간자를 사용하는 점 이외는 향악정재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뿐만 아니라 고려 이래의 〈헌선도〉 이하 다섯 가지의 당악정재와 조선 초기에 창작된 당악정재로서 조선 말기까지 전한 〈몽금척〉·〈하황은〉도 의장대(儀仗隊)와 죽간자만 그대로 유지되었을 뿐 춤에 따르는 구호, 치어 및 반주에 이르기까지 향악정재의 형식으로 변화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당악이 조선 중기 이후에 겪은 변화와 같은 것으로서 당악정재의 향악정재화라고 해석할 수 있다.

(3) 일 무 조선시대의 일무는 종묘제례와 문묘제례에서 연행되었다. 세조 10년 이후 종묘제례에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6일무로 된 〈보태평지무〉와 〈정대업지무〉가 사용되었으며 문묘제례에서는 8일무가 쓰였다.

문묘제례의 일무에 사용된 의물은 문무의 경우 약과 적, 무무의 경우 간과 척(戚)이었고, 종묘제례에서는 문무의 경우 약과 적, 무무의 경우 검(劍)·창(槍)을 들었다.

(4) 백희가무 조선시대의 백희가무 전통은 나례 및 외국사신들의 환영절차 등에서 연행되었다. 이러한 백희가무는 일명 산대잡희(山臺雜戱), 고악잡희(鼓樂雜戱)라고 하였으며, 그 내용은 〈근두 筋斗〉·〈무동(舞童)태우기〉·〈죽광대〉·〈줄타기〉·〈사자무〉·〈학무〉·〈꼭두각시놀음〉 등이었다.

세종 32년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예겸(倪謙)의 기록을 보면 중국사신들을 환영하고 환송할 때 여러 연희패들과 백희로 공연을 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여기에서는 갖가지 동물들의 몸짓으로 추는 춤이 많았기 때문에 이것을 어룡만룡지희(漁龍曼龍之戱)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 전통무용의 갈래와 종류 -

우리 나라 전통무용은 춤추는 목적과 그 춤의 사회적 기능에 따라 분류해 보면 크게 종교의식무용, 민속무용, 교방무용(기방무용), 궁중무용 등으로 나누어진다.

〔종교의식무용〕

종교 의식춤은 원시적이고 소박한 민간 신앙적 차원을 넘어서 좀더 종교의식으로서 체계적이고 형식화되어 있는 춤을 말한다.

즉, 무속 의식춤, 불교의식춤, 유교의식춤, 장례의식춤이 그것이다. 무속춤인 경우 무당이 춤추고, 불교춤은 승려들이 추며 유교의 춤은 궁중예인인 무동들이 추었다. 또한 장례춤은 상두꾼이나 무가(巫家)사람들이 춘 것이다. 따라서 종교의식춤은 민중의 춤이 아니고 특정한 종교예인들의 춤이다.

무속춤은 크게 나누어 강신무당이 신이 되어 추는 춤〔神舞〕과 세습무당이 추는 축원춤〔祝願舞〕이 있는데 이들의 춤에서 강신무당의 춤을 주로 신령과 접신하기 위한 춤〔接神舞〕, 신령이 노는 춤〔神遊舞〕, 주술적 춤〔呪術舞〕, 신의 복을 주는 춤〔神福舞〕을 추며 세습무당의 춤은 주로 신을 맞이한 춤〔請神舞〕,신을 즐겁게 하는 춤〔娛神舞〕, 신을 보내는 춤〔送神舞〕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춤들은 서울지역을 비롯하여 경기 및 충청지역, 경상도 및 강원도의 동해안지역, 한강이북지역, 제주도지역 등 6개 지역에 따라 움직임이 다르다.

불가에서는 불교무용을 작법춤〔作法舞〕이라 한다. 작법춤은 49재를 비롯하여 백일재, 예수재(豫修齋) 수륙방생재, 영산재(靈山齋) 등에서 춘 의식춤으로서 범패와 같이 재식절차에 따라 추어진다.

작법춤의 종류는 바라춤, 법고춤을 비롯하여 착복춤〔着服舞〕로서 나비춤(서울지역의 춤)과 고기춤(전라도지역의 춤) 그리고 타주춤〔打柱舞〕 등이 있다.

유교의식무용은 종묘제와 문묘제에서 추어진 춤인데 이를 일무(佾舞)라 한다. 일무에는 문무(文舞)와 무무(武舞)가 있는데 제사의식에서 초헌(初獻) 때는 문무를 추고 아헌(亞獻)과 종헌(綜獻)때는 무무를 춘다.

장례무용은 아직도 산간벽지나 섬지역에서 볼 수 있다. 즉, 진도지방의 다시래기, 강원도나 경상도지방의 산악지대에서 행하고 있는 방상씨춤, 그리고 강윤도 산악지대에서 행하고 있는 회다지가 그것이다.

〔민속무용〕

민속춤이란 민족의 기층 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는 예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민속춤을 즐겼던 계층은 농민, 어민, 상인과 천민 등 소위 피지배 계층인 서민 대중이었으며 감상을 하기보다는 직접 참여하여 춤추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민속춤은 개인적 사고보다는 온 겨레가 오랫동안 생각해서 창조한 춤이기 때문에 춤의 창작자는 개인이 아니라 다수이며 따라서 그들의 미의식에서 나온 공동 창작춤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민속춤은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소멸되지 않고 민중에게 공감을 주는 춤이 된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민속춤은 대동춤, 누리춤, 우리춤, 마을춤, 민중춤, 서민춤, 대중춤이라는 말을 곁들여서 쓰기도 한다.

농악은 경기 및 충청농악, 영동농악, 영남농악, 호남우도농악, 호남좌도농악 등 5개 지역에 따라 가락과 춤이 다르다. 예컨대 경기농악의 춤은 무동들의 춤과 8법고춤, 부들상모의 부도춤, 진풀이 등이 특색적이고 영동농악은 8법고춤, 농사풀이춤 등 특색이 있다. 영남농악은 채상모춤, 부들상모의 부포춤, 진풀이, 북춤, 소고잡이 등의 채상모춤과 거리기춤, 수박(手拍)춤, 북춤 등이다.

호남우도농악은 진풀이를 비롯하여 쇠꾼 등의 발림춤과 부포춤, 장고춤, 고깔소고춤, 채상모 소고춤, 잡색 등의 가면춤 등이 특색적이고 호남좌도농악은 쇠꾼 등의 부포춤, 장고춤, 채상모 소고춤, 무동춤, 잡색 등의 가장놀이춤 등이 있다. 탈춤은 크게 보아 서낭제탈놀이 계통을 비롯하여 산대극 계통이 있다.

서낭제탈놀이 계통인 경우 하회별신굿 탈놀이춤은 주지, 초랭이, 백정, 할미, 부네과 중, 양반, 선비, 부네 등의 배역에 따른 춤이 있고, 강릉관소가면놀이의 춤은 장자마리, 양반광대, 소매각시, 시시딱딱이 등의 배역에 따른 춤이 있다.

또한 북청사자놀음의 춤은 배역 전원의 장기춤, 사자춤이 있다. 산대극탈놀이 계통의 춤은 대체적으로 승려역을 비롯하여 천미역, 반인반수(半人半獸)역, 문둥이역, 동물역, 포수역, 양반역, 영감역 등의 춤들이 있다.

소리춤 계통의 춤은 남성춤인 경우 대표적인 춤은 지계목발춤이라 할 수 있고 경기도나 경북지방에는 논뚝밟기춤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성들의 춤은 전라도 남해안 지방에 강강술래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다양한 춤들이 분포되어 있으며 이 밖에 서해안과 동해안 지방과 안동 지방에도 몇 가지의 춤이 남아 있다.

〔교방춤(기방춤)〕

가무를 담당한 기녀는 다양한 유형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관에 적을 둔 기녀로서 궁중에 설치된 교방(敎坊) 소속의 교방기(敎坊妓)와 지방 관청에 적을 둔 지방기(地方妓)로 구분되었다.

둘째 관에 매이지 않고 기업(妓業)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사기가 있었다. 셋째, 사가(私家)에 기거하면서 관기와 마찬가지로 춤과 노래를 익혀 사대부들을 받들던 가기(家妓)가 있었다.

이 밖에 재(才)와 색(色)과 미(美)를 갖춘 남자들이 기녀와 같은 일을 하는 남기(男妓) 등이 있었다. 남기들은 기녀와 마찬가지로 궁중에 머물며 가무를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의 남기는 조선시대에도 존속했는데 외연찬에서의 무 등 정재무가 바로 남기의 존재를 말해 준다.

교방청에서의 기녀의 교육과정은 매우 엄격하여 15세에 기안(妓案)에 올라 가무를 학습하였으며 재주가 출중하면 서화도 익혔다. 일류 기생이 되려면 사범들에게 호된 기합을 받으며 어려운 전수과정을 감수해야 했고 이러한 교육과정을 거쳐 각 지방 관아에 배치되면 기생의 우두머리격인 수행 기생에게 복종해야 했다.

그러나 조선 왕조의 몰락으로 교방청은 폐지되고 관기들은 서울을 비롯하여 여러 지방으로 흩어지고 권번(券番)이나 기생조합(妓生組合)을 조직하여 부자들의 생일잔치나 회갑연에 불려가 가무함으로써 주연(酒宴)에 추어진 예술적인 사랑채춤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교방춤은 교방청에서 다듬어졌지만 예술적으로 발전한 것은 교방이 폐지된 후의 기방(妓房)이었으므로 이른바 판소리, 가야금 산조, 삼현육각과 같이 개인적 멋과 기예능이 높은 수준에 있는 춤이 된 것이다. 교방인들에 의해 추어진 춤은 궁중정재춤도 있었지만 이들 창우와 기녀들이 창작한 춤은 승무를 비롯해 살풀이춤(수건춤), 태평무, 입춤, 남무, 한량무 등이다.

〔궁중재무〕

궁중정재는 통일신라 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는 동안 창제되어 궁중에서 춘 춤이다. 정재무는 ≪고려사 高麗史≫ 악지(樂志)와 ≪악학궤범 樂學軌範≫·≪진연의궤 進宴儀軌≫·≪진찬의궤 進饌儀軌≫·≪진작의궤 進爵儀軌≫ 등의 문헌에 기록되어 전하는데 그 종류는 50여 종이 된다.

정재에는 중국 계열의 당악 정재와 우리 나라 사람들이 창조한 향악정재가 있다. 당악은 중국의 역대 제국이 그 나라마다 그들의 습속과 생활 등을 그 나라의 국악으로 표현하고 개창한 속악, 즉 향악인데, 이것이 우리 나라로 유입되자 통칭하여 당악이라 불리었으며 이러한 당악의 영향을 받아 우리 속악파 속무가 합하여 창조된 것이 향악정재라 한다.

조선 초기의 정재는 유교정치사상의 이념으로 예와 악을 국가의 안정과 정치의 안정을 꾀하고자 한 문화적 통치수단으로 반영한 정치적 기능이 후기에 와서는 봉건사회의 해체과정으로 신분제의 동요가 극심해지면서 왕권과 지배층의 정치적 기능의 약화로 정재는 유교정치의 이념인 예·악사상으로서 정치를 행한다는 사상적 기반이 흔들리면서 의식적인 성격이 약화되고 반면에 왕과 권력층의 감상의 대상으로 발달하면서 그 당시 예술성이 깃든 순수무용으로 발전했다.

따라서 초기의 정치·문화·생활 전반에 걸쳐 중국의 모방이 아닌 우리의 주체성이 강조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정재의 양상이라 할 수 있는 당악이 향악으로 동화되는 것도 이러한 시대적 배경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정재춤을 보면 향악 정재와 당악 정재라는 특징적 틀을 벗어나 하나의 궁중 정재로서의 새로운 틀을 창조한 것이 뚜렷이 나타난다.

예컨대 정재 음악에서 향·당악의 구분이 없어졌고 곡이름도 바뀌는 경우가 있다. 춤의 형태는 죽간자가 춤을 방해하여 그 위치를 바꾸었으며 창사의 가사 내용이 왕에 따라 달리하는 경우가 생겼다. 또 선모·왕모 등 주역과 조역인 원무 또는 협무의 구실이 확실해졌고 창사가 축소되고 춤이 길어지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이는 왕의 취향, 주관을 하는 사람들의 의견과 이른바 연출을 담당한 사람의 예술적 욕구에 따라 개작되었다 할 수 있다.

춤에 담겨 있는 내용은 군왕의 만수나 입적을 찬양하는 춤을 비롯해 나라의 태평성대, 풍년기원, 잡귀를 막는 춤, 시상(詩想)을 나타내는 춤 나비나 학의 모습을 행용하는 춤도 있고 꽃을 주제로 하는 춤과 꽃놀이를 하는 춤, 아박이나 방울을 들고 추는 춤 등도 있다.

춤에 따라 그 형식이 서무(序舞)으로서의 춤이 있고 무대장치가 있고 무용극형식과 같은 춤이 있는가 하면 가설무대(輪臺)에서 추는 춤도 있다.

  • 신무용 -

신무용이란 현대무용사상에 의거하여 오늘의 한국적 시대정신과 감각에 바탕을 두고 새로운 무용미를 추구하면서 무대예술로서의 한국무용을 추구하여 나가려고 하는 활동이자 그 결과로 산출되어 나온 무용작품을 가리키는 말이다.

본래 신무용이란 개념과 용어의 시발은 일본의 여류시인 하세가와(長谷川時雨)의 신무용연구소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한 데서 연유한다.

이 일본식 용어가 우리 나라에 수입된 것은 광복 이전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상황에 기인한 것이나, 이후 우리 나라의 춤문화를 설명하는 데 이 용어가 가지는 모순이 없다고 판단되어 공식적인 영역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서 신무용의 기점은 조택원(趙澤元)·최승희(崔承喜)에 의한 1930년대 초반부터의 무용창작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우리 나라의 신무용사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926년 3월 21일∼23일 경성일보사가 주최하여 당시의 공회당에서 막을 올린 무용가 이시이(石井漠)의 공연을 우리 나라 신무용의 효시로 삼는 것이 하나의 관례이다.

이것은 이시이의 무용이 독자적인 신무용을 표방하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 나라의 신무용사의 초창기와 요람기를 주름잡았던 두 사람의 선구자 최승희·조택원으로 하여금 신무용에 눈뜨도록 자극제가 되어 주었다는 데 근거한다.

즉, 최승희는 1926년 3월, 조택원은 1927년 11월 이시이의 서울공연을 본 직후 이시이의 문하에 들어가 무용가의 길을 걸었던 것인데, 이들의 무용활동이 비로소 한국의 신무용을 이끌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무용활동이 처음부터 신무용의 개념과 이념에 충실하였던 것은 아니며, 최승희의 경우 1934년 일본공연에서 선보인 〈에헤야 놓아라〉에서, 조택원의 경우 1935년 〈승무의 인상〉(후에 袈娑胡蝶으로 불림.)에서 각각 신무용의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이후 본격적인 작품활동의 축적은 최승희의 이러한 외국공연에서 펼쳐지기 시작하는데 이 당시의 주요작품으로는 〈초립동〉(1936)·〈화랑의 춤〉(1936)·〈신로심불로 身老心不老〉(1937)·〈춘향애사〉(1936)·〈옥적의 곡〉(1937)·〈보현보살〉(1937) 등이 있다.

최승희의 이러한 외국공연 성공은 그에게 세계적인 무용가로서의 명성을 가져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 만연되어 있던 무용가에 대한 천시관을 일소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조택원의 경우도 최승희처럼 많은 해외공연을 가지면서 자신의 예술영역을 넓히게 되었는데, 1941년 〈춘향조곡〉에서 뜻밖의 호응을 얻은 뒤 〈부여회상곡〉(1941)을 발표하면서 신무용사의 한 장을 여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일제 말기의 극심한 간섭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지 못한 채 광복을 맞게 되며, 이로써 신무용의 역사는 1950년대 이후 김백봉(金白峰)의 출현 때까지 암중모색기를 겪게 된다.

즉, 광복 이전 신무용계를 이끌고 있던 무용가들의 작품경향은 서구무용의 본질에 서서 한국적 양식을 인상적으로 섭취, 여과시키는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고, 보다 적극적인 신무용의 개념정립은 1950년대 이후 김백봉의 활동에서 크게 진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1962년 국립무용단의 발족과 대학에서의 무용교육 등이 신무용계의 활성화에 큰 요인이 되었다.

이밖에 한국의 신무용사에서 중요한 인물은 민속무용 가락을 정리하고 무대화를 시도한 한성준(韓成俊)을 비롯하여, 1960년대 이후 국립무용단을 이끌어온 송범(宋范)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오늘날까지 성하게 연무되는 신무용 레퍼터리로는 〈화관무〉·〈장구춤〉·〈부채춤〉 등을 꼽을 수가 있다.

  • 현대무용 -

프랑스의 저명한 무용평론가 르뱅송(Levinson,A.)은 현대무용의 창시자 던컨(Duncan,I.)의 예술사상을 자연주의의 신봉과 그리스 정신의 부활로 귀납시킬 수 있다고 하였던바, 그 발상의 근원적 동인은 철저한 형식주의와 고답적 기교주의를 본질로 삼는 고전발레에 대한 반발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유미주의와 형식주의에 대응하는 새로운 자연법칙을 대안으로서 제시하지 못한 채, 무원칙적인 신체운동만을 고집하였던 탓으로, 한때나마 무용으로 하여금 아마추어의 차원까지 끌어내리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이에 대한 내부적 반성은 라반(Lavan,R.)에 의한 육체문화의 이론적 정착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그의 충실한 후계자 뷔그만(Wigman,M.)은 표현주의 무용의 우수성을 발판으로 새로운 무용영역의 확고한 지위를 구축하였으니, 데니스(Denis,R.)·그래함(Graham,M.)·험프리(Humphrey,D.)로 이어지는 미국 현대무용계의 눈부신 성과와 더불어 오늘날 무용예술의 양대산맥을 이룩하는 세계적 예술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인간의 사상을 육체운동을 빌려 가장 솔직하고 가장 자유롭게 표출하려 한다는 데 그 이상을 두며, 인간 심층에 접근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받아들였던 현대무용이기에, 아무런 규제도 어떠한 규범도 존재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은 당연하며, 그런 까닭에 추구하는 바 체제도 다양하고 모색되는 바 영역도 다변하여, 근자의 현대무용운동은 바야흐로 백화난만(百花爛漫)하는 장관을 이루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의 현대무용운동은 광복 이전까지는 불모지상태였으나, 광복 이후부터 한때 일본에서 다카다(高田世子)를 사사한 바 있는 박외선(朴外仙)이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현대무용을 담당하게 되고, 각 대학교에 무용과가 설치되면서 유능한 신인들이 배출되어, 1970년대 후반부터는 직업무용단의 출현과 해외무대 진출이 늘어나면서 급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 발레 -

르네상스를 계기로 유럽 여러 나라 궁중에서 성행되던 연회무용은 점차 극적 줄거리를 담는 감상무용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고, 루이14세의 왕립무용학교 창설(1661)이 전문적인 직업무용수의 배출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자, 발레는 귀족들의 심심풀이놀음에서 예술적인 차원으로 승화되어갔다.

카마르고(Camargo,M.)·잘레 (Salle',M.) 등 두 여성무용수에 의해서 시행된 의상개혁(1726∼1734)이라든지, 노베르(Noverre)에 의한 이론화의 성공, 자유혁명(1789)이 몰고 온 대중화의 물결, 그리고 발레 로맨틱(Ballet Romantic)의 비약적 신장과 디아길레프(Diagilev)의 발레 뤼스(Ballet Russes)가 거두어들인 일찍이 없었던 흥행적 성공에 힘입어, 발레는 현대무용의 강력한 도전을 받기 이전인 19세기 말엽까지 오직 유일한 예술무용으로 500년 가까운 영화를 누려왔다.

환몽적인 이야기를 전개하여 가면서 인간의 육체가 이룩할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격조높은 조화로서 구현하고자 하는 발레는, 극한상황에 이르는 고도의 기술성과 엄격한 규율로 다져지는 형식주의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직업무용수를 양성하는 발레학교는 9년제의 완벽한 전문교육체제를 갖춘 실기위주의 교과과정으로 짜여져 있으며, 여기서 격렬한 운동을 감당해 낼 수 있는 강인한 체력과 기술과 예술성을 교육받는다.

우리 나라 발레의 역사는 광복 후에 와서야 정상적 궤도를 타게 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국립발레단의 발족으로 본격적인 신장세를 보이기 시작하였으나, 전통성의 결여, 무용학교의 부재 등 여러 여건이 아직도 미흡한 채로 남아 있어 국제적 차원까지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 전통무용이론의 연구현황 -

한국무용에 관한 사료는 ≪삼국사기≫ 악지를 비롯하여 ≪고려사≫ 악지, ≪악학궤범≫의 권3·4·5·8·9, ≪증보문헌비고≫의 악고(樂考), 영조 갑자(甲子) ≪진연의궤≫, 순조 무자(戊子) ≪진작의궤≫, 기축(己丑) ≪진찬의궤≫, 헌종 무신(戊申) ≪진찬의궤≫, 고종 무진(戊辰) ≪진연의궤≫, 조선 말기의 각종 ≪궁중정재무도홀기 宮中呈才舞圖笏記≫, 윤용구(尹用求)편 ≪국연정재창사초록 國宴呈才唱詞抄錄≫, ≪시용무보 時用舞譜≫ 등의 고전을 섭렵하여야 한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과 ≪수서 隋書≫·≪구당서 舊唐書≫·≪신당서 新唐書≫ 등 중국문헌과 ≪일본서기 日本書紀≫·≪속일본서기≫·≪교훈초 敎訓抄≫ 등의 고전도 아울러 공부하여야 하는 힘겨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전통음악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도 절실하게 요구된다. 그러므로 그동안의 전통무용 이론연구는 이러한 난제를 극복하지 못한 채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전통무용연구와 관련된 주요연구성과는 안확(安廓)의 〈산대극과 처용무와 나례〉(1932)·〈가면무용극고〉(1937), 송석하(宋錫夏)의 〈처용무, 나례, 산대극의 관계를 논함〉, 이혜구(李惠求)의 〈산대극과 기악〉(1953), 조원경(趙元庚)의 〈나례와 가면무용〉(1955), 이주환의 〈이용무보해제〉(1956), 장사훈(張師勛)의 〈고전무용해설〉(1961)·〈정재창사 관규(管閨)〉(1962), 문일지(文一枝)의 〈학무〉(1972), 장사훈의 〈한국전통무용서설〉(1977) 등을 들 수 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한국무용 이론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7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점차 활발해지고 괄목할만한 결실로 나타나며, 그 이전까지의 주류는 거의가 가면극과 나례와의 관련이라든지 탈춤에 관한 연구로 한정되어 있었다. 이는 전문적 무용이론가의 희소성과 더불어 활발한 학술연구의 촉매작용을 뒷받침해줄 제도적 장치가 미흡하였던 데 연유하는 현상이다.

이밖에 〈탈춤〉 및 여러가지 갈래의 춤에 관한 저서, 자료집 그리고 그밖의 이론서를 열거해보면, 김재철(金在喆)의 ≪조선연극사≫, 조원경의 ≪무용예술≫(1967), 이두현(李杜鉉)의 ≪한국가면극 韓國假面劇≫(1969), 김천흥(金千興)의 ≪한국무용의 기본무보≫(1969), 김정연(金正淵)의 ≪한국무용도감≫(1971), 안제승(安濟承)의 ≪한국신무용사연구≫(1972), ≪무용개론≫(1981), ≪한국무용사≫(고대∼근세편, 1981), 김매자(金梅子)의 ≪한국무용사≫(1976), 장사훈의 ≪한국전통무용연구≫(1976), 성경린(成慶麟)의 ≪한국의 춤≫(1977), ≪한국전통무용≫(1978), 김백봉의 ≪봉산탈춤무보≫(1976), 윤병석(尹炳奭)의 ≪한국무악고≫(1979), 김옥진(金玉珍)의 ≪한국무용춤사위≫(1981), 송수남(宋壽男)의 ≪무용교육의 이론과 실제≫(1982), 박금슬(朴琴瑟)의 ≪춤동작≫(1982), 정병호(鄭昞浩)의 ≪한국춤≫(1985), ≪농악≫(1987) 등이며, 이밖에 국립국악원 간행도서인 ≪한국음악학자료총서≫ 중의 무용원전 자료간행 및 〈무보〉, 예술원 간행의 ≪한국예술사총서≫ 가운데 〈한국무용사〉(1985)와, ≪한국예술사전≫ 가운데 〈한국무용사전〉(1985) 등을 주요연구성과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상의 연구성과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현재 전통무용의 이론에 관한 연구가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 있다고 할 수 없는 형편이며, 따라서 무용이론의 학문적 정리가 절실히 요청된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高麗史, 世宗實錄, 樂學軌範, 慵齋叢話, 增補文獻備考, 東國輿地勝覽, 純祖戊子進爵儀軌, 純祖己丑進饌儀軌, 憲宗戊申進饌儀軌, 高宗戊辰進宴儀軌, 宮中呈才舞圖笏記, 三國志, 舊唐書, 한국음악연구(이혜구, 국민음악연구회, 1957), 唐樂硏究(차주환, 범학도서, 1976), 한국음악사(장사훈, 정음사, 1976), 한국전통무용연구(장사훈, 일지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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