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문경에서 주흘산(主屹山, 1,106m)을 넘어 중원의 연풍(延豊)으로 빠져나가는 산골짜기 천험의 요지에 3개의 관문이 설치되어 있고, 관문을 따라 성벽이 축조되었다.
1708년(숙종 34)에 세운 제1관문에는 ‘主屹關(주흘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협문 2개가 있는 누각은 팔작지붕으로, 높이 3.6m, 너비 3.4m, 길이 5.4m의 홍예문(虹霓門)과 좌우의 성벽이 옛 모습대로 남아 있으며, 성벽에는 총안(銃眼)이 있는 성가퀴(성 위에 낮게 쌓은 담)가 설비되었고, 오른쪽에 커다란 수구문(水口門)이 설치되었다.
제1관문에서 3㎞ 떨어진 곳에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과 중성(中城)이 있다. 중성은 1594년(선조 27)에 축성된 것이며, 제2관문의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좌우 협문이 3개 있으며 팔작지붕이다.
또, 숙종 때 북적(北賊)을 막기 위하여 소백산맥을 넘는 험로 중의 하나인 조령(鳥嶺)에 산성을 쌓았는데 이것이 지금의 제3관문, 즉 조령관이다.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좌우 협문 2개가 있으며 팔작지붕이다.
제1관문 이외 제2·3관문은 허물어져 축대만 남아 있던 것을 1975년 제2관문을, 1977년 제3관문을 각각 복원하였다.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은 적의 진로를 차단함에 있어 험준한 조령을 막지 않고 충청북도 충주 탄금대(彈琴臺)에서 왜병을 맞아 싸우다가 패하고 말았다.
그 뒤 조정에서는 이 실책을 크게 후회하여 조령에 관문을 설치할 것을 꾸준히 논의해 오다가 숙종 때 비로소 3개의 관문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세 관문의 성안에는 군사들의 진지(鎭址)·군창지(軍倉址) 등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경상감사가 교대할 때 교인(交印)하였다는 교구정지(交龜亭址)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