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단 ()

근대사
단체
1932년 간도에서 한인(韓人)의 지도기관으로서의 역할 수행을 표방하였던 친일단체.
정의
1932년 간도에서 한인(韓人)의 지도기관으로서의 역할 수행을 표방하였던 친일단체.
개설

1932년 2월 15일 창립대회를 통해 결성되었다.

연원 및 변천

1929년부터 간도에 있던 한인 정치세력은 민족주의운동·사회주의운동·중국귀화운동으로 분화하였다.

초기 세 세력이 대립·경쟁하던 양상은 점차 사회주의 대 비사회주의란 대립구도로 진행되었다. 비사회주의 세력, 예를 들면 연변자치촉진회(延邊自治促進會, 1930년 10월 13일 결성)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1930년 7월 결성)의 정치적 입장은 친중(親中)·반일(反日)·반공(反共)이었다. 이들은 중국 동북군(東北軍)의 적색유격대 토벌작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회주의 세력은 1931년 후반기의 추수투쟁(秋收鬪爭), 1932년 봄의 춘황투쟁(春荒鬪爭) 때 반일·반중(反中)·반지주(反地主)투쟁을 전개했다.

그런데 1931년 9월에 일어난 만주사변은 친중·반일·반공세력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즉 연변자치촉진위원회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 측의 지시와 정세의 불리함 때문에 10월 말 경부터 활동을 중지하는 한편, 반일에도 소극적 태도를 취했다. 이 무렵 재간도 한인 각 정치세력의 동향에 큰 변수로 등장한 것이 민생단의 결성운동이다.

1931년 9월 26일서울의 갑자구락부(甲子俱樂部) 이사 조병상(曺秉相)과 매일신보(每日新報) 부사장 박석윤(朴錫胤)은 이량(李亮)·김동환(金東煥)과 함께 간도에 도착했다.

그들은 간도 총영사관의 양해를 얻고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는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간도 재주선인(在住鮮人)의 자각을 촉진하고 자위상(自衛上) 서로 단결하고 산업인으로서의 생존권 확보’를 위해 단체를 조직하자고 주장했다.

이들은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 회장들, 재간동포구제단장(在間同胞救濟團長), 연변자치촉진위원회 인물들, 재한화교위문단(在韓華僑慰問團) 등과도 접촉했다. 1931년 10월 7일, 이들은 마침내 자위·자립·자결을 내세우며 민생단 결성 허가권을 간도 총영사관에 제출하고 동의를 구했다.

이후 4인은 서울로 돌아가 조선총독부에 민생단 조직계획을 설명했다. 이에 따라 간도 총영사관에서는 민생단 결성운동이 조선총독부의 양해를 얻은 것으로 인정하고, 민생단이 ‘간도 재주 선인의 생활을 안정’시켜 재간한인(在間韓人)의 건전한 발흥을 유도할 수 있다고 보고 결성을 승인했다.

이 단체의 결성 움직임이 구체화하자 민족파와 공산파는 이 단체의 위상문제를 두고 의견을 달리해 공산파는 참여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사회주의 세력을 제외하고, 간도에 주재한 한인 정치세력은 이 단체의 결성운동에 합류했던 것이다.

1931년 11월 15일 용정(龍井)에서 500여 명이 참여하여 마침내 간도에 있는 모든 단체의 통수기관을 주창한 민생단의 발기총회가 열렸다. 그리고 이듬 해 2월 15일 창립대회에서 단장 선출은 유보한 채 한상우(韓相愚) 부단장과 31인의 이사를 선출함으로써 민생단이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기능과 역할

이 단체는 1932년 7월 14일 사실상 해체상태에 이를 때까지 여러 가지 활동을 전개했다. 첫째, 간도에 사는 한인의 공민권 획득과 특별자치구 설립 청원운동을 제창했다.

둘째, 1934년 일본군이 항일 무장대오를 토벌하기 위해 간도파견대를 출동시켰을 때, 이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셋째, 자위단(自衛團) 지도자의 양성을 위해 간도자위단훈련소(間島自衛團訓練所)를 개설했다.

넷째, 자신들의 조직기반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했다. 민생단은 각 현(縣)에 지단(支團), 필요한 곳에 분단(分團)을 설치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 민생단은 만주에 살고 있던 한인의 생활안정과 낙토 건설을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반공·친일활동에 주력한 단체였다.

참고문헌

『실록 친일파』(임종국, 돌베개, 1991)
「1932~36년 시기 간도지역에서 전개된 ‘반「민생단」투쟁’ 연구」(신주백,『성대사림』 9, 1994)
『간도신보(間島新報)』
『滿洲共産匪の硏究』-第一輯(軍政部顧問部,1936)
집필자
박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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