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안부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에, 예의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영숙(榮叔)
농은(農隱)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여흥(驪興)
주요 관직
예의판서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고려 후기에, 예의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영숙(榮叔), 호는 농은(農隱). 도첨의사인(都僉議舍人) 민유(閔孺)의 아들이며, 두문동(杜門洞)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학문과 지행이 높았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찍이 등과하여 대소의 관직을 거치고 공양왕 때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다. 1392년(태조 1) 이성계(李成桂)가 개국을 하자 이에 반대하여 구홍(具鴻)·박심(朴諶)·채귀하(蔡貴河)·이맹운(李孟芸) 등 72현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가서 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조선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주어서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고, 경상남도 산청 산음현(山陰縣)의 대포리(大浦里)에 숨어 살면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송경(松京)을 바라보면서 망국을 추모하였다. 자손들을 경계하여 조선조에 벼슬하지 말도록 하였고, 현감에 기용된 아들을 사직하게 하였다.

영조조에는 민안부를 비롯한 72현의 충신들이 은거하여 있던 그 곳을 부조현에 봉하고 치제하는 은전을 내렸다. 산청 영남유림들에 의하여 숭절사(崇節祠)에 제향되었고, 정조 때는 표절사(表節祠)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송도지(松都誌)』(김육)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남공철)
『해동충의록(海東忠義錄)』(조덕상)
집필자
권오호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