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영숙(榮叔), 호는 농은(農隱). 도첨의사인(都僉議舍人) 민유(閔孺)의 아들이며, 두문동(杜門洞)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학문과 지행이 높았다.
일찍이 등과하여 대소의 관직을 거치고 공양왕 때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다. 1392년(태조 1) 이성계(李成桂)가 개국을 하자 이에 반대하여 구홍(具鴻)·박심(朴諶)·채귀하(蔡貴河)·이맹운(李孟芸) 등 72현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가서 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조선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주어서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고, 경상남도 산청 산음현(山陰縣)의 대포리(大浦里)에 숨어 살면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송경(松京)을 바라보면서 망국을 추모하였다. 자손들을 경계하여 조선조에 벼슬하지 말도록 하였고, 현감에 기용된 아들을 사직하게 하였다.
영조조에는 민안부를 비롯한 72현의 충신들이 은거하여 있던 그 곳을 부조현에 봉하고 치제하는 은전을 내렸다. 산청 영남유림들에 의하여 숭절사(崇節祠)에 제향되었고, 정조 때는 표절사(表節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