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원경(遠卿), 호는 천식(泉食). 민달용(閔達鏞)의 아들로, 민태용(閔泰鏞)에게 입양되었다.
1871년(고종 8)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81년 이조판서로 승진했으며, 곧 이어 군무변정기연사당상(軍務邊情譏沿司堂上)과 한성부판윤에 올랐으며, 평안도관찰사도 역임하였다.
1883년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가 되어 전권대사로서 조영(朝英) 및 조독수호조약(朝獨修好條約)을 조인하였다. 또한, 그 해 1월 일본과 부산구설해저전선조관(釜山口設海底電線條款)을 체결하였고, 6월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 및 해관세칙(海關細則)·일본인어채범죄조규(日本人漁採犯罪條規)·조선국간행리정약조(朝鮮國間行里程約條) 등을 조인하였다. 그리고 8월 인천일본조계조약을 체결하였다.
1872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개화주의자인 박규수(朴珪壽) 등과 같이 서양의 기술 도입과 개국통상의 유용성을 강조하였다. 1882년의 임오군란 때 변장 도주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장례를 치를 때 이회정(李會正)·정범조(鄭範朝)와 함께 국장도감제조(國葬都監提調)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박문국당상(博文局堂上)이 되어 박영효(朴泳孝)·유길준(兪吉濬)·김윤식(金允植)·김만식(金晩植) 등과 같이 1883년 10월 30일 우리 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민태호(閔台鎬)·민영익(閔泳翊) 및 민응식(閔應植)과 함께 이른바 사민체제(四閔體制)를 구축, 권력의 핵심인물로 부각되었다.
이로 인해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 병조판서로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 인사들에 의해 조영하(趙寧夏)·민태호 등 수구당 요인과 경우궁(景祐宮)으로 입궐하다가 참살당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