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사위(士衛), 호는 숙야재(夙夜齋). 관찰사 민광훈(閔光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고, 아버지는 민진후(閔鎭厚)이며, 대사헌 민우수(閔遇洙)의 형이다.
일찍이 진사로서 세마(洗馬)의 자리에 올랐으나, 조정이 당론으로 소란스러운 것을 보고는 과업(科業)을 포기한 채 동생 민우수와 함께 여강(驪江)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그 뒤 공조좌랑·사어(司禦) 등에 제배(除拜)되었으나 관직에 오르지 않았다.
1729년 재행(才行)으로 한덕필(韓德弼) 등과 함께 별천(別薦)에 올랐다가, 1737년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음보(蔭補)로 기용되었다. 1740년 지평(持平)으로 대직(臺職)에 올라 그해에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다. 그런데 같은 해 이른바 위시사건(僞詩事件)이 일어나 1717년(숙종 43)의 이이명(李頤命)의 정유독대(丁酉獨對) 때의 일이 드러났다.
이와 함께, 종제(從弟) 민형수(閔亨洙)가 김용택(金龍澤)의 아들 김원재(金遠材)의 집에 영조가 쓴 시가 있고, 이를 그가 보았다고 말하여 이 사건에 말려들었으나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구원하여 삭직(削職)되는 정도에 그쳤다. 1804년(순조 4) 좌의정 서매수(徐邁修)의 진언에 의하여 관직과 시호의 추증이 결정되어, 이듬해 정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