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제호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대한민국청년단 재무부장, 임시정부 외사국장, 상해 교민단 서구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칭
소운(少雲)
이칭
민우명(閔禹明)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0년(고종 27)
사망 연도
1932년
출생지
서울
정의
일제강점기 때, 대한민국청년단 재무부장, 임시정부 외사국장, 상해 교민단 서구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개설

자는 소운(少雲). 일명 민우명(閔禹明). 서울 출신.

생애 및 활동사항

서울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하고 한성영어학교(漢城英語學校)에서 수학중 1910년 한국이 일본에 강점되자 1912년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갔다. 신규식(申圭植)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대한민국청년단에도 가입, 재무부장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4월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여운형(呂運亨) 등과 같이 제2차의정원회의에 참석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그 해 5월 2일 재원염출 방침에 대한 각 지방의원의 의견을 들은 임시의정원회의에서는 구급의연금과 인두세(人頭稅) 모집, 내외에 공채 모집 등의 방법을 가결하였다.

그 뒤 각 지방에서 우선 구급의연금 모집위원 3명씩을 선거하여 업무를 수행하게 할 때, 여운형·박희선(朴熙善)과 함께 경기도 대표가 되었다. 이후 대한적십자회의 회원 모집활동에도 종사하였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참사(參事)와 외사국장(外事局長) 등을 역임하였다.

1923년에는 김상옥(金相玉)의 귀국을 주선,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최초로 시가전을 전개하도록 뒷받침해 주었다. 같은 해 상해 교민단의 서구위원(西歐委員)으로, 임시정부 외곽단체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으며, 그 뒤 여러 차례 임시의정원 의원을 역임하였다.

1932년 이봉창(李奉昌)과 윤봉길(尹奉吉)의 의거 후 검거 위협을 받고 항저우[杭州]로 피신,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임시의정원기사록(大韓民國臨時議政院紀事錄)』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법통성』(이현희, 동방도서, 1987)
『대한민국임시정부사』(이현희, 집문당, 1982)
『독립운동사』 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한국독립운동사』 1∼4(국사편찬위원회, 1965∼1968)
『朝鮮獨立運動年鑑』(在上海日本總領事館警察部 第二課編, 東文社書店, 1946)
집필자
이현희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