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호는 석린(石麟). 서울 출신이다.
1910년 7월 서울 휘문의숙을 졸업하였다.
1911년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한 뒤 신규식(申圭植)이 경영하던 박달학원(博達學院)에 입학, 중국어와 영어를 배웠다. 다음해 7월 이 학원을 졸업하고 그 해 9월 다시 남양학당(南洋學堂)에 입학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미 그 해 2월 학생신분으로 동제사(同濟社)와, 그 뒤 확대 조직한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1917년 7월 남양학당을 졸업하였다.
그 후 중국관립 교통부 상해체신학교에서 수학중인 신규식이, 국내에 있던 이상재(李商在)·손병희(孫秉熙) 등에게 민중시위운동을 전개하라는 밀서를 작성할 때 연락사무를 보좌하였다.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에 수립된 뒤 그 해 7월 임시정부 법무총장 신규식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후 신규식의 비서로 일하면서 정풍문학원(正風文學院)에 입학, 중국 고문학을 연구하다가 다음 7월 졸업하였다.
1921년 10월 임시정부국무총리대리이며 외무·법무 총장인 신규식 특사의 수행비서로, 손문(孫文)의 광둥호법정부(廣東護法政府)를 찾아가 임시정부의 정식 승인을 얻는 데 공헌하였다.
1923년 10월부터 1936년 4월까지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의 비서로 재무의 실무 책임을 맡고 경비 조달에 힘을 쏟았다. 한편 1924년 1월 상해교민단의사회 학무위원이 되어 인성학교(仁成學校) 운영과 교육비 납부의식 고취 등 교포 교육사업에 힘썼다.
1936년 김구(金九)를 저장성[浙江省] 자싱[嘉興]에 있는 호법의장(護法議長) 추푸청[褚輔成]의 저택으로 피신하게 했으며, 이동녕(李東寧)·이시영·엄항섭(嚴恒燮)·조완구(趙琬九)·안공근(安恭根) 등을 항저우[杭州]로 각기 피신하게 할 때 이를 주선하였다.
1937년 10월 난징[南京] 교통부의 전정사(電政司)가 되었다가 그 해 12월 중국군사위원회 위원장 장개석(蔣介石) 시종실의 암전연구소(暗電硏究所) 총무(대령급)로 일하였다.
또한 군사위원회 기술연구실 제3조장(소장급)으로 근무하던 중, 1938년 11월부터 장개석의 시종실이 이동함에 따라 쿤밍[昆明]·충칭[重慶] 등지로 이동, 근무하다 1939년 5월에 사임하였다.
1939년 5월 임시정부 김구 주석 판공실장 겸 외무차장에 임명되었으며, 임시의정원의원에 선임되었다. 또한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에 선출되어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복간, 발행하였다.
처음으로 임시정부 무장경비대를 조직하는 한편, 광복이 되자 중국국민당과 교섭, 임시정부의 환국 경비 6억 원과 비행기 두 대를 빌리는 데 성공하여 임시정부 요인의 환국사무를 무사히 끝내도록 힘썼다.
임시정부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 부단장에 임명되어, 단장 박찬익(朴贊翊)을 도와 임시정부의 잔무를 정리하고 화북·화중·화남·만주 일대의 대표단 분단을 설치하였다. 1957년 7월에 귀국, 충칭에서 창설된 한중문화협회(韓中文化協會)를 재건하였다.
또한 그 때까지 중국에 남아 있던 한국교포 문제를 중국의 유력 정치가와 교섭하여 매듭지었으며, 1948년 8월 대만(臺灣)주재 초대총영사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저서로 『한중외교사화(韓中外交史話)』가 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