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0년(의종 24) 무신정권이 수립되자 전국적으로 반란이 자주 일어났는데, 경상도 지방에는 운문의 김사미(金沙彌)와 초전(草田 :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의 효심(孝心) 등이 자못 기세를 떨쳤다.
이에 정부는 상장군 최인(崔仁)을 남착적병마사(南路捉賊兵馬使), 대장군 고용지(高湧之)를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로 삼아 토벌을 강행하자, 김사미는 1194년 관군에게 투항하여 참살당하였다. 그런데 1200년 밀성의 관노 50여 명이 관의 은기(銀器)를 훔쳐 운문적(雲門賊)에게 투속하였다.
이로써 김사미가 관군에게 참살된 뒤에도 운문적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은기를 훔친 것으로 보아 이들의 행위는 경제적 이유가 컸다고 생각된다. 즉, 밀성의 공역노비(供役奴婢) 50여 명이 경제적 궁핍을 이기지 못하여 관아의 은기를 훔쳐 운문의 반란군에 투속한 것이다.
이것은 노비와 농민의 반란이 결합된 형태로서, 신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던 노예들이 정부에 대하여 반기를 들고 일어났으며, 때에 따라서는 같은 피지배층인 농민과도 연결을 가지게 되어, 민란의 기세는 이후에도 좀처럼 약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