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군실(君宲). 할아버지는 좌참찬 박중손(朴仲孫)이고, 아버지는 예조참의 박미(朴楣)이며, 어머니는 지돈영부사 강석덕(姜碩德)의 딸이다.
1486년(성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98년(연산군 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에 보임되었다. 곧이어 홍문관박사·봉상시주부·홍문관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504년 정언으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廢妃尹氏)의 추숭(追崇)을 반대하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목천(木川)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서 정언으로 복직되고 이듬해 지평으로 승진, 이어 사인(舍人)·응교·집의를 거쳐 통례원좌통례 등을 역임하였다. 1515년(중종 10) 동부승지가 되었고 또 상호군(上護軍)에 임명되었다. 이어 대사간을 지내고 병조참의가 되었다.
1518년 관압사(管押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고, 뒤이어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었다. 뒤에 황해도관찰사로 나갔으나 도둑을 토벌하지 못한 죄로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되어 강릉부사로 임용되었고, 만기가 되자 이조참의가 되었다.
1528년 좌승지를 거쳐 한성좌윤 등을 역임하였다. 맏형이 아들이 없어 뒤를 잇지 못하므로 박광영이 작위를 이어 받아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그 뒤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32년 공조참판에 부총관을 겸하였고, 이후 형조참판, 경주부윤 등을 역임하였다. 박광영은 직언으로 대신들의 미움을 샀고 생원으로 있을 때 나라에서 배척하는 불교를 숭봉했다는 죄목으로 곤장을 맞고 유배되기도 하였다. 또 폐비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유배되는 등 많은 파란을 겪었다. 외교에도 상당한 수완을 가지고 있어 중국을 세 번이나 다녀왔고, 어려운 일들을 곧잘 처리해 왕의 신임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