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종 ()

박기종 교지
박기종 교지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부하철도회사, 대한철도회사 등을 설립한 기업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39년(헌종 5)
사망 연도
1907년(고종 44)
출생지
부산
정의
대한제국기 부하철도회사, 대한철도회사 등을 설립한 기업인.
개설

부산 출신으로서 일찍부터 상업에 종사, 주로 일본 상인들과 거래하면서 일본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력이 계기가 되어 1876년 5월 김기수(金綺秀)를 수반으로 하는 제1차 수신사(修信使) 일행의 일본 시찰여행 때 역관으로 동행할 수 있었다. 이 때 일본의 각종 산업시설과 제도 등의 근대화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것이 후에 우리나라의 철도건설사업과 교육제도의 근대화에 진력하게 된 배경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본시찰 때 역관의 관직을 얻은 것을 계기로 귀국 후 계속하여 각종 관직을 거쳤고, 부산 경무관의 관직에 있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박기종은 일본시찰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던 신문화교육에 대한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 1896년 3월 부산상업학교의 전신인 부산개성학교를 창설하고 주로 기술과 일어교육에 힘썼다.

또한, 당시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철도부설권 획득을 위한 치열한 경합의 와중에서, 국내의 철도는 민족의 기업으로 건설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1898년 5월 한국 최초의 민족철도회사인 부하철도회사(釜下鐵道會社)를 창설하였다.

부하철도회사는 부산과 하단포(下端浦)를 연결하는 철도 부설을 목적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일명 ‘하단철도’라고도 하였다. 하단철도는 건설에 대한 강렬한 의욕에도 불구하고 자금 부족 등으로 사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또다시 1899년 5월 대한철도회사를 설립하고 경원선·함경선의 부설 허가를 얻어 건설사업을 계속하려 하였다. 이때는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실현을 보지 못했다.

그래도 끝까지 철도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못하여 다시 영남지선철도회사(嶺南支線鐵道會社)를 창립하고 삼랑진과 마산을 연결하는 삼마철도(三馬鐵道)의 부설권을 얻어 공사진행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때도 일본의 집요한 농간으로 자금 조달이 여의치 못해 공사를 중단하고 말았다.

이처럼 박기종은 평생 동안 철도 부설에 뜻을 두었고, 국내 철도는 민족계 회사에 의해 건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 침략이 날로 극심해가는 당시에는 박기종의 이러한 뜻은 끝내 이루어질 수 없었다.

박기종은 국가 중흥은 산업개발에 있다는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큰아들은 일본의 광산학교, 둘째 아들은 철도학교에 유학시키기도 하였다. 1908년 구포저축주식회사를 설립한 윤상은(尹相殷)은 박기종의 사위였다. 윤상은이 지방은행 설립에 큰 업적을 보인 것도 장인의 뜻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구한국관보(舊韓國官報)』
『대한제국관원이력서(大韓帝國官員履歷書)』
「박기종의 생애와 기업활동」(조기준, 『박원표회갑논총』, 1970)
『황성신문(皇城新聞)』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朝鮮貴族列傳』(大村友之丞, 朝鮮總督府印刷局, 1910)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조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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