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희정(希正), 초자는 이정(頤正), 호는 정암(正菴) 또는 슬한재(瑟僩齋)·의속헌(醫俗軒)·저헌(樗軒). 박휘(朴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영창(朴永昌)이고, 아버지는 좌랑 박유(朴瑜)이며, 어머니는 이원영(李源英)의 딸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1546년(명종 1) 사마시에 장원하고, 같은 해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성균관전적으로 기용되었다. 곧이어 예조좌랑·사간원정언을 지내고, 홍문관부수찬을 거쳐 공조좌랑에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그 뒤 병조좌랑·수찬을 지냈고, 1553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뒤에 해남현감(海南縣監)이 되었으나 1년 만에 삭탈관직을 당했다가, 2년 뒤 다시 기용되어 지평(持平)을 거쳐 홍문관교리에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그 뒤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과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을 거쳐 병조정랑이 되었다. 종경청도감(鍾磬廳都監)을 거쳐, 사인(舍人)·장령·예문관응교를 지냈다.
1554년 공조참의에 승진되고, 곧이어 동부승지·대사간을 지내고,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삭탈관직되었다.
10년 뒤 다시 기용되어 상주목사(尙州牧使)가 되었으나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충주목사로 옮겼다. 1570년(선조 3) 다시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고, 그 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서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가 되었다. 그 뒤 우부승지·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1575년 함경북도병마절도사를 지내고 돌아와서 한성우윤을 지내고 동지경연(同知經筵)에 오위도총부부총관을 겸하였다.
그 뒤 형조참판을 거쳐 다시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일에 연루되어 하옥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584년 복직되어 상호군·동지첨지부사 등을 지냈다.
서경덕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전공했고 역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문장에 뛰어났다. 불의에 굽히지 않는 기질 때문에 이기(李芑)와 윤원형(尹元衡) 등의 미움을 사서 여러 번 배척을 당하였다.
변방의 수령이 되었을 때 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낡은 병기를 보수하고 군대를 조련(調鍊)하는 등 무비에 힘썼다. 저서로는 『슬한재집(瑟僩齋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