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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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
고대의 교육을 맡아 보던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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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대의 교육을 맡아 보던 관직.
내용

박사는 학식이 박통(博通)한 자로 임명되었는데, 이 제도가 처음으로 생긴 것은 중국 진(秦)나라 때 박사를 두어 고금(古今)의 학문을 맡게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뒤이어 한나라 때는 9경(卿)의 하나인 태상(太常)의 속관(屬官)으로 박사를 두었고, 동중서(董仲舒)는 춘추(春秋)로써 박사가 되었으며, 무제(武帝) 때는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어 자제를 교육하였다.

다시 진(晉)나라 때는 국자박사(國子博士)·율학박사(律學博士) 등을 두었고, 당나라 때는 국자박사·태학박사(太學博士)·사문박사(四門博士)·율학박사·산학박사(算學博士)·의학박사 등을 두었으며, 명·청 때는 국자박사·태상박사(太常博士)를 두었는데, 태상박사는 교육보다도 의례에 관한 찬술과 시호(諡號) 제정 등의 일을 맡았다.

우리 나라에서 박사의 관직이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중국에서 위만(衛滿)이 망명해 오자 고조선의 준왕(準王)이 그를 신임하고 총애하여 박사에 임명하고 100리의 땅을 주었다는 기록이 그 최초이다. 그러나 그 박사가 학식이 박통해서 임명한 것인지, 또는 고조선의 어떠한 고유의 관직을 한자로 음사(音寫)한 것의 표기인지 확실하지 않다.

박사의 관직제도가 확실히 행해진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00년(영양왕 11) 고구려의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이 전해 오던 ≪유기 留記≫ 100권을 고쳐서 ≪신집 新集≫ 5권을 편찬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것으로 고구려에 박사의 관직제도가 행해졌음을 확실히 알 수 있는데, 여기에서 태학(太學)이라 함은 고구려의 중앙 최고의 대학으로, 이를 통해 볼 때 고구려의 태학에는 박사를 두어 자제의 교육을 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근초고왕 때 박사 고흥(高興)이 ≪서기 書記≫를 편찬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것으로 백제에 박사라는 관직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는데, ≪일본서기 日本書紀≫ 등 일본의 고대 사료에 의하면, 백제에서 박사 왕인(王仁), 오경박사(五經博士) 고안무(高安茂), 박사 단양이(段楊爾) 등이 일본에 건너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 밖에 백제의 의박사(醫博士)·역박사(易博士)·역박사(曆博士) 등을 교대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것을 보면

백제에도 일찍부터 박사의 제도가 있어, 오경 등 경학(經學)에 관한 박사를 비롯하여 의학·역학 등의 각종 전문 분야에 관한 박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682년(신문왕 2) 중앙 최고의 국립대학인 국학(國學)을 설치하고 박사를 두어 자제에게 유학을 교육하였다. 또, 국학의 학생에게는 유학 이외에 산학박사를 보내어 산술에 대한 교육도 행하였다.

이 밖에 신라에는 누각전(漏刻典)에 누각박사 6인을 두어 물시계에 관한 학문연구와 교육을 실시하였고, 의학박사를 두어 의학을, 천문박사(뒤에 사천박사로 고침)를 두어 천문학을, 율령박사를 두어 율령(律令)을, 통문박사(通文博士)를 두어 문학을 교육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지(三國志)』
『일본서기(日本書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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