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중온(仲溫), 호는 인재(認齋) 또는 눌재(訥齋). 박안의(朴安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미창(朴美昌)이고, 아버지는 군자감부정 박사화(朴士華)이며, 어머니는 신복담(辛福聃)의 딸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16년(중종 11) 진사가 되고, 1519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사림이 일소되자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성균관전적에 등용되고, 1522년 박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파직되었다. 1527년 다시 박사로 복직되어 전적을 지내고 사헌부감찰로 승진되었다.
이듬해 광양현감이 되어 해상의 방위에 전념하고, 공자의 묘가 허술한 것을 보고 터를 닦아 묘우를 옮겨지었다. 1533년 수부원외랑(水部員外郎)이 되고 곧 이조좌랑으로 옮겼으나, 김안로(金安老)의 청혼을 거절한 것이 원인이 되어 미움을 사게 되었다.
1535년에 공조좌랑, 이듬해 장악원첨정이 되었으나, 간관의 탄핵으로 문외출송을 당하였다. 그 뒤 다시 복직되어 홍문관교리와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를 거쳐 종부시(宗簿寺)와 봉상시(奉常寺)의 첨정을 지냈다. 1540년 밀양부사로 특선되어 치적을 올렸고, 1544년 좌필선(左弼善)에 이어 곧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가 되고 하절사(賀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예조참의를 지내고, 1549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관동지역을 잘 다스렸다. 그러나 이기(李芑)의 연척인 양구현감 신난수(愼蘭秀)의 비행을 적발하여 보고하였다가 도리어 고문을 받고 왕의 특명으로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