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언주(彦胄), 호는 야천(冶川). 박병문(朴秉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박임종(朴林宗)이고, 아버지는 이조정랑 박조년(朴兆年)이며, 어머니는 현감 윤자선(尹孜善)의 딸이다.
어린 나이로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 나아가 문인들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그 때가 무오사화(戊午士禍) 뒤라서 사림의 사기가 침체되었으나 가야산에 들어가 공부에 열중하였다. 또한 박영(朴英)을 찾아가 학문에 힘쓴 결과 식견이 더욱 넓어져 당시 친구들이 모두 추앙하였다.
1518년(중종 13) 향공(鄕貢) 3과에 모두 장원하고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현량과에도 천거되었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1519년 식년 문과에 장원하였다. 이어 강석(講席: 강의나 강론하는 자리)에 나가서는 행동이 조용하고 응대가 상세해 모두 옥당정자(玉堂正字)를 얻었다고 치하하였다.
또한 조광조(趙光祖)는 “그의 용모를 보니 남의 아래에 설 사람이 아니다. 어찌 정자로만 기대하겠는가. 대과에 장원할 것이다.”라고 인물됨을 평가하였다. 1522년 부수찬(副修撰)이 되었으며 그 뒤 정언(正言)·지평(持平)·사인(舍人)·필선(弼善)을 역임하고, 조광조 등 신진 사류와 함께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1529년 평안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고 사간에 임용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김안로(金安老) 등의 훈구파를 전한(典翰) 조종경(趙宗敬)과 함께 탄핵하려다가 일이 착수되기 전에 허항(許沆)이 김안로에게 고해 도리어 사성(司成)에 좌천되었다. 그 뒤에도 여러 번 탄핵해 그들의 미움을 사서 1530년 파직당하고 고향인 합천에 내려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평생 성현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리고 용모를 보면서 서로 이야기하면 사람을 감화시키는 덕기가 있어 모두 명도(明道)의 기상이 있다고 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나주의 반계서원(潘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