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천한 가문출신이었으나 풍채가 뛰어나고 행동과 말에 있어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의종(毅宗) 때 중금군(中禁軍)에 보직되었고, 무신정변으로 명종이 즉위하자 좌중금지유(左中禁指諭)가 되었다.
이 때 무신들이 정권을 잡아 문신들을 제거하여 여러 행정문서가 처리되지 못하고 쌓이게 되었을 때, 이를 처리함으로써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다. 그러나 1178년(명종 8) 청주인(淸州人)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 100여 명이 죽었는데도 청주사심관(淸州事審官)으로서 이를 막지 못한 책임으로 파면당하였다. 이후 복직되어 병부상서가 되었다.
1185년에 박순필의 사저(私邸)를 동궁(東宮) 근처에 크게 지었는데, 왕도 두려워 그것을 말리지 못하였다. 뒤에 추밀원사(樞密院使)를 거쳐 1190년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가 되었고, 그 이듬해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