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소하(小霞) · 심향(心香) · 심향(深香). 서울 출신. 1905년 창명학교를 졸업하고 YMCA 중학부에 진학하였다. 1913년에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 강습소에 입학하여 조석진(趙錫晉)과 안중식(安中植)으로부터 전통적인 화법을 지도받았다.
1916년 서화미술회를 졸업하고 이듬해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갔으나 3·1운동으로 중국내 한국인의 감시가 심해지면서 1920년 일본 경찰에 의해 압송되어 귀국하였다. 2년간 옥천경찰서의 감시와 연금 하에 지내다가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서화협회(書畵協會) 회원이 되어 서화협회 전람회와 초기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 사실적인 수법의 향토적 풍경을 출품하면서 전통 화단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1933년부터는 선전에는 거리를 두고 서화협회전에만 출품하였다.
1930년대 중엽부터는 사의(寫意)의 전통적 산수경(山水境)으로 회귀하는 변화를 나타내면서 부드럽고 자잘한 점선을 구사하는 특징적인 화풍을 형성해 나갔다. 그것은 현실경(現實景)과 관념적 화취(畵趣)를 절충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1940년에는 조선미술관이 기획한 『십명가산수풍경화전(十名家山水風景畵展)』에 초대되어 작품을 전시하였다.
50대에 접어들어 완전히 옛 법에 충실한 안정된 기법의 전통 산수로 독자적인 양식을 정립시켰다. 그러나 화면에 등장하는 민가(民家)와 움직이는 점경인물(點景人物)의 표현에서는 한국적인 풍정보다는 중국풍의 관념적 형식을 반복하는 한계를 보였다.
박승무는 광복 후 춘곡 고희동이 주도하는 미술계와 거리를 두고 홀로 작가생활을 하였다. 1949년에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가 시작되어 추천 작가 · 초대 작가로 추대되었으나 한 번도 출품하지 않았다. 6·25 전쟁 뒤에는 대전에 정착하여 외롭고 곤궁한 화필 생활을 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1971년 서울신문사 주최의 『동양화6대작가전』과 1976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한국동양화대전』에 초대되었다. 대표작으로는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의 「설청(雪晴)」이 있다.
1957년 충남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2008년 7월 25일 대전 중구 목달동 묘소에서 28주기 추모식이 열렸으며, 2009년 3월 심향선양위원회에서 유고화집인 『소요(逍遙), 그 깊고 그윽한 향기』를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