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상주(尙州). 초명은 박안신(朴安信), 자는 백충(伯忠). 박원정(朴元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천(朴瑔)이고, 아버지는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박문로(朴文老)이며, 어머니는 박사덕(朴思德)의 딸이다.
1393년(태조 2) 생원이 되고 1399년(정종 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으로 등용, 1408년 사간원좌정언(司諫院左正言)이 되어 대사헌 맹사성(孟思誠)과 함께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과 목인해(睦仁海)의 모반사건을 왕에게 알리지 않고 처리하다가 극형을 받게 되었으나, 옥중에서 “직분을 완수하지 못하여 죽음을 감수하나 임금님께서 간신(諫臣)을 죽였다는 말을 들을까 두렵도다.”라고 쓴 시가 태종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황희(黃喜)·하륜(河崙)·권근(權近)·성석린(成石璘) 등의 무마로 유배에 그쳤다.
뒤에 집의(執義)·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를 역임하고, 1424년(세종 6) 회례사(回禮使)로 일본에 다녀왔는데, 이때 도중에서 침입해온 해적을 위력으로 물리쳐서 무사히 귀환하게 되었다. 귀국 후 우사간에 임명되었고, 이어 공조·예조·병조의 참의, 병조·예조·형조·공조·이조의 참판을 거쳐 대사헌, 황해도·전라도·충청도·평안도의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439년 형조판서, 이듬해 우참찬, 1442년 공조판서로 나이가 많아 치사(致仕: 벼슬길에서 물러남)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이조판서에 전직되어 1444년 예문관대제학을 겸하였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