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자실(子實), 호는 송당(松堂). 할아버지는 안동대도호부사 박철손(朴哲孫)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박수종(朴壽宗)이며, 어머니는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딸이다. 선산(善山)에서 대대로 살았다.
어릴 때부터 무예에 뛰어나 담 너머 물건을 쏘아도 반드시 맞히므로 아버지가 기이하게 여겨 이름을 영(英)이라 하였다. 1487년(성종 18) 이세필(李世弼) 막하(幕下)에 있을 때 종사관(從事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91년 원수(元帥) 이극균(李克均)을 따라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였다. 이듬해 돌아와서 겸사복(兼司僕)이 되고, 9월에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항상 자신이 무인으로서 유식한 군자가 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이에 1494년 성종이 별세하자 가솔들과 함께 고향으로 가서 낙동강 변에 집을 짓고 송당(松堂)이라는 편액을 걸고, 정붕(鄭鵬) · 박경(朴耕) 등을 사우(師友)로 삼아 『대학(大學)』과 경전을 배워 격물치지(格物致知)에 힘써 깨닫는 이치가 많았다.
1509년(중종 4) 선전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이듬해 삼포(三浦)에 왜구가 침입하자 조방장(助防將)으로 창원(昌原)에 부임하였다. 1514년 황간현감(黃澗縣監)이 되어 훌륭한 치적을 남겼고, 1516년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지냈다. 1518년 의주목사(義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같은 해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소환돼서 임명되었으며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를 역임하였다.
1519년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그 해 5월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모면하였다. 이듬해 김해부사(金海府使)가 되었다가 곧 사직했는데, 김억제(金億濟)의 모함으로 유인숙(柳仁淑)과 함께 혹형을 받았으나 무고(誣告)임을 적극 주장해 풀려날 수 있었다. 뒤에 영남좌절도사(嶺南左節度使)로 임명되었으나 곧 타계했다.
의술에도 능하였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황간의 송계서원(松溪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당집(松堂集)』 · 『경험방(經驗方)』 · 『활인신방(活人新方)』 · 『백록동규해(白鹿洞規解)』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