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했다. 1929년 삭성(朔星)미술연구소에 연구생으로 들어가 그림의 기초를 다졌다. 1931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고, 같은해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에 「풍경(風景)」으로 입선했다. 1932년 제11회 선전에서도 「횡향(橫向)한 좌상(座像)」으로 입선했고, 최연해(崔淵海)·권명덕(權明德) 등과 함께 청년미술동호회인 '오월회(五月會)'를 조직했다. 1933년 도쿄의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畵學校]에 학교에 입학, 1936년 졸업했다. 선전에 계속 참가하여 1936년 제15회 1938년 제17회까지 연속해서 입선했고, 1939년의 제18회에서는 「대동강소견(大同江所見)」으로 특선과 조선총독상을, 1940년 제19회에서는 「신개지(新開地)」로 특선했다.
1943년 '성전(聖戰) 하에서 미술보국(美術報國)에 매진'의 취지로 설립된 '단광회(丹光會)'에 참여했고, 그해 6월 단광회 회원들과 함께 조선인 징병제 실시를 찬양·홍보할 목적으로 4개월에 걸쳐 100호 크기의 「조선징병제실시기념」을 공동 제작했다. 이 그림은 경성과 평양의 순회전을 거쳐 1944년 6월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기증되었다. 같은해 3월 호전적인 관제(官製) 전시회인 '결전미술전'에 「추격(追擊)」을 출품했고, 제23회 선전에서 「모자한일(母子閑日)」로 특선했다.
해방 이후 1946년 조선미술가동맹에 중앙집행위원으로 참여, 회화부 위원장을 맡았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의 추천·초대작가,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했고, 1949년 대한문인협회의 준비위원을 맡았다. 1953년부터 3년간 홍익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1955년부터 1958년까지 프랑스의 아카데미 그랑드쇼미에르에서 공부했으며, 1956년 파리국제미술전에 초대받아 출품했다. 1960년부터 서라벌예술대학·중앙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1976년 정년퇴임했다. 1960년 대한미술협회 부이사장, 1972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장 등을 역임했고, 1976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94년 6월 15일 사망했다.
문예상 예술 부문(1966년 5월), 3·1문화상 예술 부문(1968년), 대한민국예술원상(1973년)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