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인보(仁輔). 할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 박호(朴虎)이고, 아버지는 병조참의 박종남(朴宗男)이며, 어머니는 군수 이세준(李世俊)의 딸이다.
1605년(선조 38)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을 거쳐 웅천현감(熊川縣監)이 되었다. 1614년(광해군 6)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려는 것을 반대하다가 위원(渭原)에 유배되었다. 그런데 그곳은 후금과 가까운 지역인 데다 박영신이 힘센 무장이라 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해 다시 진도로 이배시켰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오위장이 되었다가, 곧 경원부사로 나갔다. 그러나 노모의 봉양을 위해 가까운 고을로 가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회양부사(淮陽府使)를 제수하도록 했으나 그것도 거리가 멀어서 왕의 배려로 풍천부사(豐川府使)가 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고군(孤軍: 수가 적고 도움이 없는 외로운 군대)으로 평산의 기탄(歧灘)을 방어해 반란군의 서울 직행을 저지하려 하였다. 하지만 모든 장수들이 반군을 바라보고 먼저 도망했고 저탄수장(猪灘守將) 또한 도주해 숨었다.
홀로 반란군을 맞이해 언덕을 의지하면서 싸워 많은 반군을 살상했으나 화살이 다하고 활이 꺾어져 사로잡혔다. 이괄은 평소 박영신의 용맹을 알고 있어 생포한 것을 기쁘게 여기고 함께 반란에 협력할 것을 백방으로 설득했으나 실패하였다.
반군의 장수 이수백(李守白)이 살려두면 후환이 두렵다 하여 칼로 내리쳤는데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반군의 장수들을 꾸짖었다. 병조참판에 추증하고 정문을 내렸다. 금천의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