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덕여(德汝). 할아버지는 박성원(朴成源)이고, 아버지는 금은군(錦恩君) 박종규(朴宗珪)이며, 어머니는 교관 유명원(柳明垣)의 딸이다.
1786년(정조 10)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 감제(柑製)에서 수석해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포상을 받았다. 1789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관직에 나갔고, 같은 해 정약용(丁若鏞) 등과 함께 강제문신(講製文臣)으로 뽑혔다.
1791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어 활발한 언론 활동을 했으며, 이듬해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의 校理나 修撰을 선임하기 위한 제1차 추천 기록)·도당록(都堂錄: 홍문관의 校理나 修撰을 선발하기 위한 의정부의 제2차 추천 기록)에 올랐다. 1794년 광주(廣州)·죽산·양성에 암행어사로 나갔다.
1797년 부교리(副校理)로 있으면서 교리 심규로(沈奎魯) 등과 함께 이명연(李明淵)의 관직 임명에 반대하다가 한 때 강외(江外)로 출송당했으나 곧 다시 등용되었다. 1799년 부수찬(副修撰)·수찬을 역임하면서 정치달(鄭致達)의 처인 화완옹주(和緩翁主)의 처벌을 주장하는 등의 정치 활동을 하였다.
1800년 상의원정(尙衣院正)으로 있으면서 세자 책봉의 공으로 상을 받기도 했으나, 정조가 죽은 뒤 순조 초년에는 관인으로서의 활동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 시기에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金氏)의 후원을 기반으로 정권을 오로지하던 김달순(金達淳)·심환지(沈煥之) 등의 벽파(僻派)와 정치적 입장이 달랐기 때문에 정계에서 배제된 듯하다.
그 뒤 김조순(金祖淳)의 딸이 순조비로 책봉되어 안동김씨(安東金氏) 일문을 중심으로 정계가 재편되기 시작하던 1803년 9월 대사간으로 등용된 이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죽을 때까지 거의 공백 기간 없이 활발한 관직 생활을 하였다.
실록과 『청선고(淸選考)』에서 확인되는 순조 연간의 주요 역임 관직을 각각의 첫번째 임명 연도와 함께 들면 다음과 같다.
1804년 대사간, 1805년 충청도관찰사, 1807년 이조참판, 1809년 판윤·공조판서·형조판서, 1810년 예조판서·우참찬·대사헌·좌참찬·수원유수(水原留守), 1812년 전라도관찰사, 1814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1815년 이조판서, 1816년 병조판서, 1817년 좌부빈객(左副賓客), 1820년 호조판서·빈객, 1821년 좌빈객 등 육조의 판서를 모두 역임하였다. 특히 판의금부사에는 15회 이상 임명되었다.
1818년 사은사(謝恩使)의 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24년에는 아들이 많고 다복한 사람이 맡았던 권초관(捲草官)으로 선발되어 왕비가 공주를 낳았을 때 권초례(捲草禮)를 주재하였다.
글씨에도 조예가 있어 1807년 단경왕후(端敬王后) 온릉(溫陵)의 비석을 세울 때 해서를 썼다. 살아있을 때 금풍군(錦豐君)에 봉해졌으며, 1827년에 충헌(忠獻)의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