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에 토월회(土月會) 신인연기자양성과정을 거쳐 무대에 처음으로 등단하였다. 토월회가 극장 광무대(光武臺)를 무대로 공연할 때 주연배우로 활약하였으며, 1926년에는 토월회를 탈퇴하여 김을한(金乙漢)·김기진(金基鎭) 등과 잠시 극단 백조회(白鳥會)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1931년 여름 극예술연구회의 연구생으로 발탁되어 배우로서 새롭게 등장하여 극예술연구회의 신극배우로 활약하였다. 1935년에 상업주의적인 동양극장이 설립되자 전속극단 청춘좌(靑春座)의 중견배우로 활동하였다.
1937년에는 동양극장을 이탈하여 중간극(中間劇)을 표방한 극단 중앙무대(中央舞臺)의 창립단원으로 활약하였으며, 중앙무대가 신통한 활약을 하지 못하자 1939년에는 극단 고협(高協)의 간부배우로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1945년 조선총독부 후원의 제3회 연극경연대회에서 임선규(林仙圭)의 <상아탑에서>라는 작품으로 주연상을 받기도 하였다. 8·15광복 직후까지 수많은 작품에서 주연배우로 활약하였다. 신극 초창기의 신파극배우가 아닌, 본격적 신극배우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