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량(仲良), 호는 인재(忍齋). 박원(朴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세기(朴世基)이고, 아버지는 금창부위(錦昌副尉) 박태정(朴泰定)이며, 어머니는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딸이다.
1697년(숙종 23)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예문관의 검열과 봉교(奉敎)를 역임하였다. 1701년 이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여러 번 임명되었으며, 그해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무역의 금지를 주장하였다.
1702년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에 임명되고 1703년 도당록(都堂錄: 홍문관의 수찬·교리의 임명을 위한 의정부의 제2차 추천기록)에 수석으로 올라 홍문관의 부수찬(副修撰)·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 1704년에는 관북의 기근을 구하기 위하여 감진어사(監賑御史)로 파견되었다. 1705년 수찬, 사헌부헌납(司憲府獻納)·교리 등을 지내면서 남구만(南九萬) 등을 두호하는 등의 언론활동을 하였고, 이어 이조정랑이 되었다. 이듬해 겸사서(兼司書)를 거쳐 승지로 승진한 뒤 대사간에 올랐다. 1708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가, 다음 해 금위군(禁衛軍) 동원을 소홀히 한 죄로 나문(拿問: 구금되어 심문함)당하였다.
곧 용서받고 도승지가 되었으나 다시 추고(推考: 죄를 고찰함)당하였다. 1710년 도승지에 복귀하여 1711년 경기도관찰사가 되었고, 이후 죽을 때까지 대사헌과 도승지를 거듭하였다. 삼사(三司)의 관직을 두루 지냈으며 숙종의 사랑을 받아 오랜 기간 승지로 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