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반남(潘南). 아버지는 박태춘(朴泰春)이다.
1723년(경종 3)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임명되었으나, 1725년에 사헌부와 사간원으로부터 간신의 아들이라는 탄핵을 받아 낙향하였다.
1727년에 다시 사간원으로부터 박필우(朴弼禹)·박필기(朴弼夔)·박필룡(朴弼龍)과 함께 노론 대신 김창집(金昌集)에게 배은망덕한 행위를 했고,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추종했으며, 정호(鄭澔)를 참소해 유배시켰다는 등의 죄목으로 4형제 모두 탄핵을 받았다.
1726년 이인좌(李麟佐)가 상주로 이주했을 때 그와 만나 사생지교(死生之交)를 맺고 반란의 뜻을 품었다. 그리고 묵동(墨洞)에 있는 서제(庶弟) 만호(萬戶)의 집에서 평안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 및 호남의 한세홍(韓世弘)과 자주 모여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짰다. 그러던 중 태인(泰仁)의 현감으로 부임하자 마침 무장(茂長)에 유배되어 있던 종형 박필몽(朴弼夢)을 대장으로 삼아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1728년 3월에 최규서(崔奎瑞)의 고변(告變)으로 역모의 윤곽이 드러나게 되어 이인좌가 청주에서 난을 일으키자, 중앙에서는 박필현을 태인현감의 자리에서 몰아내려 했으나 곧이어 반란에 가담하였다.
이인좌가 청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근왕병(勤王兵: 임금 곁을 호위하는 병사)을 모집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태인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금구(金溝)를 거쳐 전주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전주성에서 반란에 가담하기로 약속했던 전라감사 정사효(鄭思孝)가 사태가 반군(叛軍)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태도를 돌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면서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반란 계획이 부하들에게 발각되어 모두 도주해 반란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에 가속(家屬)들 몇 명만을 거느리고 아들과 함께 상주에 숨어 있다가 상주의 영장(營將) 한랄(韓㻋)에게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지금 사대부는 남인(南人)·소북(小北)·소론(少論)을 막론하고 모두 이 반란에 가담했으며 평안병사 이사성이 맹주(盟主)’라는 흉서(凶書)를 남기고는 그 자리에서 아들 박사제(朴師濟)와 함께 참수(斬首)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