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일본의 일부 기성인층과 학생계에서 반전운동이 일어났다. 그 후 국내에도 그 영향이 파급되어 특히 각급 학교의 학생들이 이에 동조, 반전학생결사가 속출하기 시작하였다.
1931년부터 1933년에 걸쳐 일어난 한국학생들의 반전학생결사는 다음과 같다.
1931년 서울의 경우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227명)를 비롯해 고학당(苦學堂) · 경성제국대학 ·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 제2고등보통학교 · 경신학교 · 경성법학전문학교(서울법대 전신) · 경성기독교청년회학관 · 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50명) · 송도고등보통학교 · 개성공립상업학교 · 보성고등보통학교 · 경성제1고등보통학교(21명) ·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 휘문고등보통학교 · 중앙고등보통학교 · 중동학교(37명) 등이 반전학생결사에 가담, 열렬히 투쟁하다가 150여 명이 검거당하였다.
이어 경상남도의 산호리야학교(7명) · 부산진공립보통학교(7명) · 진주공립농업학교(21명), 경상북도의 대구사범학교(37명), 충청북도의 진천성성학교(2명), 평안남도의 평양공립보통학교(16명), 함경남도의 함흥공립상업학교(24명) 등이 이에 가담하였다.
1932년에는 전라북도의 전주사립신흥학교(26명) · 전주공립고등보통학교(73명) · 이리공립농림학교(30명), 평안북도의 신의주공립고등보통학교(26명), 강원도의 고성사립강성학원(4명), 제주공립농업학교(4명), 서울의 경성공립농업학교(19명), 황해도의 사리원공립농업학교(28명), 함경남도의 공 · 사립 각급학교(54명), 원산의 각 중학교(12명), 경상남도의 밀양공립농업학교(4명), 수원오산농우학원(8명), 평안북도의 신의주공립고등보통학교(3명), 충청남도의 예산공립농업학교(23명), 평안남도의 진남포공립상공학교(25명) · 남산현여자야학교(1명) 등 200여 명이 검거당하였다.
1933년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서울의 사립보성고등보통학교(25명) ·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5명) ·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4명) ·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4명) · 경성제2고등보통학교(11명) · 경성여자상업학교(4명) · 중앙고등보통학교(9명), 전라남도의 수피아여학교(9명) · 송정리공업전습학교(5명), 함경남도의 용원공립보통학교(5명), 평안북도의 영변공립농업학교(12명), 경상남도의 부산제2상업학교(11명) · 진흥공립보통학교외 7교(29명) · 진주고등보통학교(22명), 황해도의 해주고등보통학교(22명), 봉산과 서흥 및 평산의 각 서당(10명), 전라북도의 정읍공립농업학교(18명), 충청남도의 유성공립보통학교(4명), 강원도의 사립모곡학교(18명) · 강릉농업학교(48명), 경상북도의 대구공립농림학교(27명) 등에서 350여 명이 검거되었다.
1930년대 전반에 걸쳐 반전학생결사에는 전국의 공사립 각급학교에서 수천 명의 남녀학생이 참가하였다. 그들은 독서회, 비밀결사, 격문, 불경사건, 사회과학연구회, 학생돌격대, 노동조합, 문우회조직사건, 교사 · 학생의 연대비밀결사, 적우회(赤友會), 비밀결사동반회, TK단, RS협의회, 교사의 혁명선동교원조합사건, 반제(反帝)학생동맹, 청년학생회사건 등 각종의 명목을 띤 비밀결사의 항쟁으로 반전운동을 연대투쟁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