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자예부운략』은 시부(詩賦)를 지을 적에 운(韻)을 찾기 위하여 만든 운서(韻書)로 사전의 일종이다. 주로 과거에 응시하는 선비를 위하여 만든 것이므로 과거를 관장하는 주무부서인 ‘예부(禮部)’의 명칭을 붙인 것이다. 크기는 세로 20.5㎝, 가로 46.2㎝, 두께 1.8㎝이다.
『예분운략』은 원래 중국 송나라 1037년(인종 경우4)에 정도(丁度) 등이 칙명을 받들어 편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중국의 운서가 유입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958년(광종 9)부터 시(詩)·부(賦)·송(頌)으로 과거를 보았다는 기록 등이 있어 이때에는 적어도 과거 준비용으로서 운서가 우리나라에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중국 운서를 그대로 복각하는데 그치지 않고, 조선식의 운서를 다시 편찬하였다. 조선의 운서 간행은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후 두 가지 양상을 보인다. 하나는 종래와 같이 중국의 운서를 복각하거나 이와 유사한 운서를 편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훈민정음식 발음부호 체계로 한자음(漢字音)을 표기한 운서의 편찬이다.
『예부운략』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한 자운(字韻) 공부에 애용되어 일찍부터 조선판이 간행되었고, 『예부운략』과 짝을 이루어 사용된 독특한 형식의 『삼운통고(三韻通考)』가 간행되었다. 이어 중국의 운서인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및『홍무정운(洪武正韻)』이 복각되었다. 중국음을 표기하기 위해 새로이 제작된 운서로는 『사성통고(四聲通考)』와 『사성통해(四聲通解)』가 있고, 또한 한자의 조선음을 훈민정음식 발음부호 체계로 표기한 운서로는 『동국정운(東國正韻)』·『화동정음통석운고(華東正音通釋韻考)』·『삼운성휘(三韻聲彙)』등이 간행되었다.
이처럼 조선조에 들어와서 여러 종류의 운서들이 새로 편찬되었으나, 현종∼숙종 연간에 『삼운통고』가 보급되기까지 여전히『예부운략』이 많이 애용되었다. 『예부운략』은 원판(元板) 복각본과 중종연간의 을해자본(乙亥字本)을 비롯하여 1573년(선조 6), 1615년(광해군 7), 1678년(숙종 4), 1679년(숙종 5), 경성제국대학교장본(연대미상) 등 여러 차례 간행되었으나, 전하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아 희귀본에 속한다. 1573년에 조판한 것을 영동판(永同板), 1615년(광해군 7)에 박경부(朴慶傅)와 경윤(慶胤) 형제가 복각한 것을 만력판(萬曆板), 1679년(숙종 5) 박동전(朴東傳)에 의하여 조판된 것을 강희판(康熙板)이라 부르고 있다.
이 판목은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소재 선암서원(仙巖書院)이 소유하고 있지만, 관리는 한국국학진흥원에서 하고 있다.
이 『예부운략』의 판목은 한 장의 결손도 없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으므로 가치가 매우 크며, 우리나라의 운서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