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과 지리를 깊이 연구하여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명당과 산세를 살펴 길흉을 점쳤다. 고종 말년에 천거에 의해 낭장이 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안주하지 못하였다.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에 임시도읍을 정하고 있던 왕이 적당한 도읍지로 어디가 좋으냐고 묻자, 삼랑성(三郎城)과 신니동(神尼洞)에 가궐(假闕)을 지으면 적이 물러가 평화가 올 것이라 하여 시행되기도 하였다.
1264년(원종 5) 몽고가 화평을 구실로 왕을 입조하라고 요구하자 권신인 김준(金俊)을 통해서 진언하기를, 마리산(摩利山) 참성(塹城)에서 왕이 친히 제사를 지내고, 또 삼랑성과 신니동에 가궐을 짓고 친히 대불정오성도량(大佛頂五星道場)을 열면 8개월이 안 되어 친조(親朝) 문제가 해결되고 주위의 대국들이 조공을 드리러 올 것이라고 하였다.
왕은 그 말을 믿고 내시대장군(內侍大將軍) 조문주(趙文柱), 국자감좨주 김구(金坵), 장군 송송례(宋松禮) 등에게 명하여 가궐을 짓게 하였다. 그 뒤 다시 도참설에 근거하여 왕의 이름에 교(釗)자를 넣어 어인(御印)의 개정을 요청하였고, 왕은 이에 따라 이름을 바꾸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