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도자기에 진사를 사용해서 문양을 나타내는 기법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개발된 것으로 고려시대 12세기 후반경에 시작되었다.
그 뒤 조선시대에 이르러 매우 드물게 사용되다가 말기에 비교적 많이 쓰이게 되나 청화(靑華) 안료의 사용에 비하면 아주 적다.
초기 조선시대 백자에 진사가 쓰였는지는 확실한 유물이나 기록이 없어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다만 도자기에 붉은색을 냈다는 조선 초기의 기록이 전하고 있어 참고가 되고 있다.
중기에는 17세기 후반의 연대가 확실한 유물로서 숭정후갑자명(崇禎後甲子銘, 1684년)이 있는 박회구백자진사접시형묘지(朴會求白磁辰砂――形墓誌) 3점이 남아 있다. 회백색의 백자 바탕 위에 주색(朱色)이 감도는 진사로 접시 앞뒷면에 묘지문을 쓴 것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따라서 늦어도 17세기 후반경에는 백자에 진사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후기인 18∼19세기에는 중앙관요인 경기도 광주의 분원(分院)과 지방가마에서, 수요는 작으나 진사백자를 만들고 있다. 중앙관요에서는 진사만 사용한 적은 거의 없고 진사와 청화 안료가 함께 사용된 예가 많으며 거기에 철화(鐵畫)까지 곁들여 사용된 경우도 있다.
지방가마에서는 둥근 항아리와 각병(角甁)에 진사로만 대나무·연화·포도·송학(松鶴) 등의 문양을 대범하고 활달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19세기 후반에는 중앙관요에서 진사만 사용해서 봉황문 등을 나타낸 예가 있으며, 십장생문·봉황문 등을 청화·철화와 함께 진사로 표현한 백자가 좀더 많이 나타나 독특한 맛을 나타내기도 한다. 간혹 그릇 표면 전체에 진사를 칠하고 무늬만을 돋을새김하여 백자색 그대로를 나타낸 것도 있다.
우리나라 도자기에 진사로 문양을 나타낸 것은 그 수도 드물지만 꼭 필요한 곳에 현란하지 않고 조용한 맛을 주는 정도에서 사용되어 우리 민족의 색에 대한 기호를 느끼게 해 준다.
현재까지 알려진 백자진사의 요지로는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 관요와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 민요(民窯) 등으로 백자진사의 파편이 조사, 수집되었다. 백자진사에 나타나는 연화문·송학문·당초문·포도문·봉황문 등의 문양이 보여 주는 힘찬 필력과 당당하고 활달한 모습은 특징있는 모습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 남아있는 대표적인 유물로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백자진사포도문항아리·백자진사연화문각병, 그리고 청화·철화가 함께 사용된 청화백자진사채항아리·청화백자진사채운봉문항아리·청화백자진사채용문산수필세(靑華白磁辰砂彩龍文山水筆洗) 및 간송미술관 소장의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국보, 1997년 지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