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 태항아리 및 태지석 ( 아리 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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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백자 태항아리 및 태지석
백자 태항아리 및 태지석
공예
유물
국가유산
조선시대의 백자 태항아리 및 태지석.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백자 태항아리 및 태지석(1993)(白磁 胎壺 및 胎誌石(1993))
분류
유물/생활공예/토도자공예/백자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보물(1993년 09월 10일 지정)
소재지
서울 관악구 남부순환로152길 53, 호림박물관 (신림동,호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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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의 백자 태항아리 및 태지석.
개설

199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외항아리의 높이 30.9㎝, 입지름 21.4㎝, 밑지름 14.1㎝. 내항아리의 높이 19.2㎝, 입지름 10.6㎝, 밑지름 8.3㎝. 태지석의 높이 26.6㎝, 너비 26.7㎝, 두께 4.6㎝. 호림박물관 소장.

내용

외항아리의 구부(口部)는 넓고 밖으로 말렸으며 짧은 목과 어깨에서 급히 벌어져 몸통 윗부분에서 중심을 이루었다가 곡선을 이루며 서서히 좁아져 저부로 연결된다. 어깨의 네 곳에 각이 진 귀를 붙였으며 뚜껑의 꼭지에 나 있는 네 개의 구멍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뚜껑의 몸체는 둥근 접시를 엎어 놓은 모양이며 상면의 중앙에 네 개의 구멍이 뚫린 둥근 연봉 모양의 꼭지를 붙였다.

유약은 회백색의 엷은 백자유(白磁釉)로 기면 전면에 입혀졌으며 광택이 있다. 굽은 안바닥을 깎아 세웠으며 가는 모래를 받쳐 구운 흔적이 있다. 뚜껑의 내면에는 가마에서 번조할 때 둥근 접시 모양의 받침을 받쳐 구운 흔적이 둥글게 남아 있으며 유색이 다르게 나타나 있다.

내항아리는 몸체와 뚜껑이 고루 갖추어져 있으며, 4개의 귀와 뚜껑의 꼭지도 외항아리를 그대로 닮아 있다. 항아리의 굽바닥에 남아 있는 모래받침의 흔적과 뚜껑의 안바닥에 남아 있는 접시 모양의 둥근 받침대를 받쳐 구운 흔적도 그대로 남아 있다.

태지에 따르면 이들 태항아리의 제작시기는 1643년이며, 왕자 아기씨[阿只氏]의 태를 담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태항아리의 제작지는 경기도 광주시 선동리요지(仙東里窯址, 1640∼1649)로 보인다.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의 1986년 발굴조사 때 출토된 태항아리의 파편 중에 동일한 태항아리편이 남아 있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16세기의 태항아리에 비해 높이가 낮아져 옆으로 벌어졌으며 태지를 대리석 대신 오석(烏石)으로 쓰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태지석은 정방형의 검은 오석으로 전면에 해서체로 ‘己卯年十月十七日卯時生王子阿只氏胎(기묘년십월십칠일 묘시생왕자아기씨태)’라고 오목새김되어 있다. 후면 중앙에는 ‘癸未年十月二十五日未時藏(계미년십월이십오일미시장)’이라고 오목새김되어 있는데, 오목새김된 글씨 안에 붉은 주사칠이 칠해져 있다. 태지의 내용을 통해 태의 주인공이 1639년(인조 17)에 태어나 1643년에 태를 묻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백자정수아지씨태호」(최순우, 『고고미술』35, 한국미술사학회,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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