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 태항아리 및 태지석 ( 아리 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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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백자 태항아리 및 태지석 중 태항아리
백자 태항아리 및 태지석 중 태항아리
공예
유물
문화재
조선시대의 백자 태항아리 및 태지석.
정의
조선시대의 백자 태항아리 및 태지석.
개설

199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외항아리의 높이 35.2㎝, 입지름 19.7㎝, 밑지름 14.6㎝. 내항아리의 높이 25.1㎝, 입지름 9㎝, 밑지름 9.2㎝. 태지석 높이 21㎝, 너비 21㎝, 두께 5.7㎝. 용인대학교박물관 소장.

내용

외항아리는 입 부분이 넓게 외반(外反)되었고 짧은 목과 어깨 부분에서 급히 벌어졌다가 서서히 좁아진 긴 몸체의 항아리로, 어깨의 네 곳에 귀가 부착되었다. 뚜껑은 넓은 접시 모양으로, 둥근 윗면 중앙에 단추 모양의 납작한 꼭지가 달려 있는데, 네 곳에 구멍이 나 있어 항아리의 귀와 서로 묶도록 되어 있다. 내항아리는 외항아리의 형태를 닮았으나, 크기는 그보다 작아서 외항아리에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유색은 회백색으로 가는 빙렬(氷裂)이 나 있으며, 항아리의 굽은 안바닥을 깎아 세웠고, 굵은 모래를 받쳐 구웠다.

태지석은 방형의 오석(烏石)이며, 윗면에 “皇明萬曆三年四月二十六日卯時生 王子慶龍阿只氏胎 萬曆九年四月初一日癸時藏(황명만력삼년사월이십육일묘시생 왕자경룡아기씨태 만력구년사월초일일계시장)”이라는 해서체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이 명문을 통하여 왕자 경룡아기씨[慶龍阿只氏]의 태호로 1581년(선조 14)에 제작 ·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이러한 백자 태항아리는 왕실의 왕자나 공주가 태어났을 때 태를 담는 용기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15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쳐 제작 · 사용되었으며, 태봉우리의 태실 안에 태지와 함께 내 · 외항아리를 함께 묻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엄정하고 단정한 격식을 갖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태항아리와 태지석의 예이다.

참고문헌

「이조전기의 백자태항」(이홍직, 『고문화』5·6, 한국미술사학회,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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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윤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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