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높이 74㎝, 너비 50㎝. 능산리 절터는 부여 능산리고분군과 나성(羅城) 사이에 있는 절터로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의 가람배치를 이루고 있는 백제시대 유적이다. 1995년 발굴조사 당시 이미 교란된 상태로 출토되었기 때문에 내부의 사리장치는 남아 있지 않으나 감실 입구 양쪽 면에 10자씩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즉 오른쪽에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백제창왕십삼년태세재)’, 왼쪽에 ‘丁亥妹□公主供養舍利(정해매□공주공양사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명문 내용 중 창왕은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이며, 그 13년인 정해년은 567년이 된다.
이 사리감은 화강암제로서 윗부분을 아치형으로 처리하여 전체 모양이 능산리고분군의 중하총 현실(玄室)과 같은 모양을 나타내고 있으며, 측면을 파서 감실을 마련하였다.
이 명문사리감의 발견 의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절의 창건 연대 및 발원자 등을 비롯한 사찰의 성격이 확실하게 밝혀진 점이다. 이 절터는 창왕의 누이, 즉 왕실에서 발원한 절로서 절의 위치와 관련지어 생각하면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발원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사리감의 형태가 능산리고분군 중 최고식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 중하총의 현실과 같은 모양이라는 점에서도 방증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많은 백제사원이 조사되었으나 명확한 절대 연대가 밝혀진 곳이 없었는데 이와 같은 절대 연대의 확인은 백제시대 사원 연구뿐만 아니라 백제고고학 전반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둘째 새로운 형태의 사리장치의 발견이다. 능산리고분 중하총의 현실(玄室)과 같은 사리감의 형태 또한 새로운 자료이지만 사리감을 목탑 심초석(心礎石) 위에 심주(心柱)와 함께 나란히 세워 놓은 것도 처음 발견되는 예로서, 삼국시대 사리장치 연구의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셋째 백제의 칭원법을 확인한 점을 들 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창왕, 즉 위덕왕 13년은 병술년이며 정해년은 14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삼국사기』는 왕의 즉위년을 선왕이 사망하고 새 왕이 즉위한 해를 새 왕의 원년으로 삼는 즉위년칭원법을 사용한 반면, 백제는 그 이듬해를 새 왕의 원년으로 삼는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을 사용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명문의 글씨체가 중국 북조(北朝)계의 글씨체인 점도 지적할 수 있다. 이것은 당시 백제가 중국의 북조와도 활발하게 교류했던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이 절터 및 부여 정림사지 등에서 출토된 소조불(塑造佛) 등에 북조인 북위(北魏)의 양식이 드러나는 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