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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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루와 벼루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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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가는 데 사용하는 문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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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가는 데 사용하는 문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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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도경≫에 따르면 “연왈피로(硯曰皮盧)”라 하여 이미 고려 때부터 벼루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보통 돌로 만들지만 와연(瓦硯)·도연(陶硯)·자연(磁硯)·이연(泥硯)·토제연(土製硯)도 있으며, 보석류나 금석류로도 만든다.

이 가운데서도 충청남도 보령의 남포지방에서 나는 남포석(藍浦石)을 가장 으뜸으로 치는데, 먹을 갈 때 매끄러워 조금도 끈적거리지 말아야 하며, 묵지(墨池 : 묵즙을 모으도록 된 오목한 곳으로 硯池라고도 한다.)에 물을 넣어 두어 10일 이상 되어도 마르지 않는 것을 좋은 벼루로 친다.

크기는 서당연(書堂硯)처럼 큰 것에서부터 손가락만한 행연(行硯 : 여행용 벼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형태 또한 원형·4각형·6각형·8각형·12각형·타원형에서부터 여러 가지 물건의 모양을 본뜬 구연(龜硯)·연화연·풍자연(風字硯)·태사연(太史硯)·금연(琴硯)·석고연(石鼓硯)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조각문양은 용·학·거북·봉황·포도·매화·난초·국화·대나무·불로초·감·물고기·팔괘(八卦)·십장생(十長生)·소상팔경(瀟湘八景) 등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문자를 돋을새김하거나 오목새김한 것도 있다.

현재까지 전해 오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은 중국 한대의 것으로서, 중국 본토와 낙랑무덤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이 중 채협총(彩篋塚)에서 출토된 벼루는 장방형의 판연(板硯)으로 칠이 된 연대(硯臺)에 고정시킨 것이고, 평안남도 평원의 석암리9호분(石巖里九號墳)에서 출토된 벼루의 경우 둥근 목대(木臺)에 붙여 세 발로 받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묵지가 없는 평평한 것인데, 먹을 개기 위한 연구(硏具, 磨石)가 딸려 출토된다.

묵지가 있는 벼루가 출현한 것은 남북조시대부터인데, 이때는 원형·방형의 벼루가 가장 많다. 당나라 이후에는 풍자연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문방구 애완의 풍조가 유행하면서 기형도 다양해졌다.

도연은 남북조시대부터 사용되었는데, 원형으로 주변이 낮아지거나 홈이 둘러진 것으로, 원대 아래는 많은 제각(蹄脚)이 받치는 형태로 된다. 당대에는 동작대(銅雀臺)의 옛 기와를 가지고 만든 와연이 유행하며, 도제의 풍자연도 생산되었다.

한편, 우리 나라에서는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도제의 원형벼루가 만들어졌으며, 삼국에서 모두 간소한 제각이 달리고 뚜껑이 있는 백족연(百足硯)이 사용되었고, 이와 함께 석제원형벼루도 전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연지(硯池) 외벽과 발에 조각이 된 벼루도 나타났다.

그런데 대체로 석연이 일반화된 것은 고려시대 이후라고 생각되는데, 현재 발굴되는 고려시대 무덤에서는 부장품으로 석제벼루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형태는 장방형을 주축으로 하여 풍자연·금연 등 다양하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크기·형태와 장식의 종류가 더욱 다양해져 석연뿐 아니라 자연(磁硯 : 자기로 만든 벼루)도 생산되었다.

우리 나라의 석연재(石硯材)는 전국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데, 무산·위원·평양·장산곶·정선·평창·장단·단양·계룡산·남포·안동·경주·언양·장수·강진 등이 대표적인 산지로 꼽힌다.

참고문헌

『이화여자대학교특별전도록』 3-벼루와 연적-(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1982)
『한국수공예미술』(김종태, 도서출판 예경, 1991)
「백제도연에 대하여」(강인구, 『백제문화』 5,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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