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대의 고대 저수지이다. 역사적 연혁에 대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흘해왕 21년조에 ‘시개벽골지안장일천팔백보(始開碧骨池岸長一千八百步)’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 지역이 백제의 영토였으므로 후세 사가들이 신라기년(新羅紀年)으로 고쳐 신라기(新羅紀) 속에 삽입한 것으로 본다면 백제의 11대 비류왕 27년(330)에 축조된 것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 뒤 790년(원성왕 6)에 증축한 사실이 있었고,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현종 때와 인종 21년(1143)에 수축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에 의하면 인종 24년(1146)에 왕의 건강이 위중해지자 무당의 말을 따라 내시(內侍)를 김제로 보내 벽골제의 제방을 트게 하였다. 그 뒤 조선시대 1415년(태종 15)에 다시 축조하였으나, 이익이 적고 폐단이 많았기 때문에 폐지하고 말았다.
현재 그 유적은 포교리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월승리에 이르는 평지에 일직선으로 약 3㎞에 달하는 제방이 잔존하고 있다. 그러나 1925년에 동진(東津) 수리조합에서 이 제방을 관개용 기간수로(基幹水路)로 개조하여 이용함으로써 그 원형이 크게 손상되었다.
이 제방에 부수된 시설로는 3개 소에 수문지(水門址)가 있으며, 거대한 돌기둥들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실려 있는 벽골제중수비문에 보면 두 개의 수문이 더 있었다고 한다.
1975년 수문지 2개 소에 대한 발굴조사에 의하면 제방의 높이는 약 4.3m이고, 윗변의 너비가 7.5m, 그리고 밑변 너비는 17.5m의 규모로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문의 너비는 4.2m로서 여기에 사용된 돌기둥의 높이는 5.5m이며, 1개의 무게는 약 8t에 달하고 있다. 수문 외부에는 호안석(護岸石) 등이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다.
한편, 저수지 수면의 만수 때 이 제방을 구축함으로써 확보되는 점유 총 면적은 37㎢, 즉 1120만 평의 방대한 지역에 달한 것으로 계산되고 있다.
이러한 토목공사는 정밀도가 매우 높은 수준측정법(水準測定法)을 전제로 해서 비로소 가능한 것으로, 이는 당시 토목기술이 고도로 발달되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 제방과 함께 이곳에 건립되어 있는 조선시대의 김제벽골제비는 1963년에 일괄해서 사적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