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무덤은 벽돌을 이용하여 일정한 양식으로 축조한 무덤양식이다. 벽돌을 재료로 하여 축조된 무덤으로 전축분이라고 부른다. 덧널무덤[木槨墓] 축조로 산림자원이 감소하여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반도의 벽돌무덤은 낙랑과 백제에서만 발견되는데 낙랑은 중국 한나라의 양식이고 백제는 남조 양나라의 양식을 모방하였다. 낙랑의 벽돌무덤은 고구려 돌방무덤이 확산되면서 점차 소멸하였다. 백제의 벽돌무덤은 부여로 천도한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터널형의 널방 형식은 부여고분군 및 대가야세력권의 함안·고령 지역 고분군에 이어졌다.
벽돌무덤이란 벽돌을 재료로 하여 축조된 무덤의 총칭인데 중국에서는 전한(前漢) 중기에 중원과 관중지역에서 등장하여 후한(後漢)과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를 거치면서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어 성행한 묘제이다.
이전까지의 묘제가 목재를 사용하는 구덩식[竪穴式]이었다면 벽돌무덤은 추가장이 가능한 굴식[橫穴式] 구조가 일반적이다. 전한대의 벽돌무덤은 공심전(空心塼)이라는 속이 빈 벽돌을 이용하여 축조하지만, 후한대가 되면 실심전(實心塼)으로 바뀐다.
벽돌무덤 등장의 배경은 여러 가지 설명이 있으나 덧널무덤[木槨墓] 축조에 따른 산림자원의 감소에 원인이 있다는 설이 지지받는 형국이다.
한반도에서 황해도와 평안남도를 중심으로 벽돌무덤이 확인된다. 이는 낙랑군의 강역이 이 지역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고고자료로 활용되었으나 반론도 있다.
낙랑에서 벽돌무덤은 먼저 유행하던 동혈합장(同穴合葬) 덧널무덤을 대체하듯이 등장하는 무덤 형태인데 벽돌무덤의 등장은 추가장(追加葬)이 어려운 선행 덧널무덤의 구조적 결함을 보완해주었다. 낙랑에서는 덧널무덤 단계에 이미 추가장이 유행했지만 그 때마다 분구와 덧널 상부를 해체해야 되는 구조적 모순이 있었다.
특히 석암리 205호 왕우묘(王旴墓)의 경우는 추가장이 무려 3차례에 이루어진 무덤이다. 즉 추가장에 대한 사회 내의 수요가 팽창한 상태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도입된 벽돌무덤은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낙랑사회에 정착된 것이다.
낙랑의 벽돌무덤은 외방무덤[單室墓]와 두방무덤[二室墓], 그리고 옆방[側室]이 달린 경우도 있는데, 이들은 등장시기와 피장자의 계층 차이가 반영되어 나타난다.
천장의 형태는 활처럼 둥글어 가운데가 높은 형태가 가장 많으며 중국에서 성행한 터널식의 벽돌무덤은 확인되지 않는다. 벽돌무덤을 구축하는 방법은 무덤구덩이[墓壙] 바닥에 벽돌을 깔고 그 위에 사방 벽을 쌓아올리는데 3번을 눕혀 쌓고 1번을 세워 쌓는 것이 특징적이다. 전실 벽면의 기저는 대개 바깥으로 호선을 그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동장구조(胴張構造)’라고 한다.
벽돌무덤에 안치되는 널[木棺]의 결구에는 쇠못이 이용되는데, 이는 이전 단계 덧널무덤과 다른 속성이다. 여기에 시기가 내려오면 벽돌무덤에 명기류가 부장되며 사용되는 벽돌의 두께가 얇아진다는 설명도 있다. 이는 부장된 청동거울의 형식과 함께 낙랑 벽돌무덤을 편년하는 중요한 속성으로 활용된다.
또한, 늦은 시기의 벽돌무덤에는 돌뚜껑[石蓋] 천장이 채용되거나 벽면의 일부를 깬돌로 축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고구려 돌방무덤[石室墳]의 영향으로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평양역 구내 벽돌무덤에서 출토된 문자 벽돌과 대방태수(帶方太守) 장무이(張撫夷)무덤에서 출토된 문자 벽돌을 참고하면 낙랑지역의 벽돌무덤은 낙랑 · 대방군이 멸망한 313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기년 벽돌자료에는 5세기대의 자료도 포함되어 있으나 무덤이 직접 발굴조사된 사례는 없다.
낙랑지역에서 유행하던 벽돌무덤은 이후 고구려 돌방무덤이 본격적으로 확산되면서 차차 소멸해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백제지역에도 웅진천도 후에 축조된 고분 중에서 벽돌무덤이 확인된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송산리 7호분), 그리고 교촌리 3호분이다.
송산리 5호분은 비록 굴식의 돌방무덤이지만 널방[玄室]에 마련된 널받침[棺臺]은 벽돌을 가지런히 쌓아서 만든 것이다. 송산리 29호분은 돌방의 바닥 전체를 벽돌로 깔아 만들었다. 무덤을 규격화된 벽돌로 구축하는 전통은 이후 부여로 천도한 사비기에도 이어진다. 즉 부여 능산리고분군의 동하총(東下塚)은 돌을 벽돌처럼 가공해서 축조한 것이다.
백제의 벽돌무덤에는 송산리 6호분과 같이 사신(四神)이 그려진 것이 있는데 이는 낙랑의 벽돌무덤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무덤 구축에 이용된 벽돌 역시 낙랑과 백제 사이에서 차이가 있다. 즉 거푸집에 채워 넣은 벽돌의 상하를 잘라내서 한번에 2매를 만드는 백제의 제작법은 낙랑에서는 없던 기법인데, 이는 낙랑과 백제의 벽돌무덤 사이에 기술적인 연속성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된다. 백제의 벽돌무덤은 기본적으로 평면형태가 장방형이고 천장은 아치의 연속 구조라 전체적으로 터널형을 띤다. 이 역시 낙랑의 벽돌무덤과는 다른 속성이다.
송산리 6호분에서 채집된 기와에는 중국 남조인 양(梁)나라에서 파견된 관리가 무덤 축조를 지휘했다고 해석되는 명문이 있다. 무덤구조의 특징을 동시에 살펴 결론을 내리면, 백제의 벽돌무덤은 백제와 중국 남조와의 밀접한 교류관계 속에서 탄생한 것임을 이해하는 데 문제가 없다.
한반도에 존재하는 벽돌무덤은 오직 낙랑과 백제에서만 발견되는데, 그 축조기법이나 내부구조에 있어 뛰어난 축조기술을 자랑한다. 낙랑과 백제의 벽돌무덤은 서로 계승관계로 연결되지 않으며 추가장이 가능한 벽돌로 만든 굴식 무덤이라는 점에서만 공통된다.
낙랑의 벽돌무덤이 중국한나라 양식의 것이라면 백제의 그것은 남조 양나라 양식을 모방한 것이어서 벽돌무덤이 외래적인 묘제이며 보편적으로 널리 수용되지 못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백제 벽돌무덤의 구조는 공주지방에 많은 돌방흙무덤[石室封土墳]과 같으며, 다만 돌 대신에 벽돌을 사용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백제의 부여천도 이후 벽돌무덤은 한반도에서 그 양식이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터널형의 널방 형식만큼은 부여고분군 및 대가야세력권의 함안 · 고령지역 고분군에 이어져 명맥을 유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