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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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기(경기도)
쟁기(경기도)
선사문화
유물
따비나 쟁기, 극젱이 등의 술바닥에 맞추는 삽(鍤) 모양의 연장.
이칭
이칭
이선(犁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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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따비나 쟁기, 극젱이 등의 술바닥에 맞추는 삽(鍤) 모양의 연장.
개설

이선(犁先)이라고도 한다. 땅을 갈아서 흙덩이를 일으키는 일을 하는데 사용한다.

연원

재질은 대부분이 철제이지만 선사시대에는 돌로 만든 것이 있었다. 그리고 서기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청동제의 원통형 보습이 출토된 경우도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재래 쟁기 중 긴술쟁기[長底犁]에는 나무로 만든 가는 봉(棒) 모양의 보습이 있다. 이러한 형태의 보습은 일반적으로 메소포타미아 쟁기 전래지역에서 볼 수 있다.

중국의 경우, 선사시대에는 돌보습이 사용되나 은대(殷代)의 유적에서 구리보습[銅犁]이 출토된 뒤로 금속제의 보습은 한대(漢代)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넓게 사용되었다.

요령성(遼寧省) 요양(遼陽) 삼도호(三道壕)의 전한(前漢)시대 유적에서는 길이 40㎝, 폭 42㎝, 높이 13㎝ 크기의 대형 보습이 출토되었다.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에서 발견된 한대의 화상석(畫像石)에 그려진 쟁기에는 삼각형의 삽형 보습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 중기 이후가 되면 돌괭이보다 발전된 형태의 농구(農具)로서 돌보습이 사용되고 조·옥수수 등의 곡류가 나타나는 보습농사단계 (서기전 3500∼서기전 3000)가 된다.

내용

돌보습은 땅을 파고 갈거나 뒤엎는데 쓰는 갈이농사를 할 수 있는 중요한 농구이다. 신바닥모양이나 버들잎모양이 많고, 길이는 30∼65㎝의 것이 보통이다.

돌보습이 출토된 유적은 봉산 지탑리, 경흥 서포항, 공주 석장리, 부안 구지리, 서울 암사동, 영변 세죽리, 여주 흔암리 등으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다.

선사시대의 돌보습은 쟁기보습으로 두 사람 이상의 협업이 필요하다. 이 시기까지는 가축이 길들여졌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없으므로 그 힘을 이용하였다고 보기 어렵고, 한 사람은 앞에서 끌고 한 사람은 뒤에서 조정하는 식의 인력을 이용한 작업형태가 행해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대개 돌보습으로는 10㎝ 미만 깊이의 땅을 가는 작업이 가능하다.

따비는 뒤지개와 쟁기 사이의 중간 형태의 연장으로 뒤지개와 비슷하면서 보습을 구비하고 있다. 비록 성에와 같은 견인을 위한 요소는 갖추지 않았지만, 쟁기와 유사한 기능을 가진 연장으로 생각할 수 있다.

따비는 갈이에 일반적으로 사용된 연장이 아니고 오늘날의 삽과 같이 쟁기는 쓸 필요가 없거나 쓸 수 없는 밭을 일구는데 한정적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연장은 아니지만 서해도서 등 일부지방에서는 근년까지도 남아 있다.

따비에 사용된 따비보습은 형태에 따라서 말굽쇠모양의 말굽쇠형, 긴 주걱처럼 생긴 주걱형, 발이 송곳처럼 뾰족한 송곳형 등으로 구분된다. 이 중에서 말굽쇠모양의 U형 날은 중국 화북(華北)의 V형 날과 구분되는 우리나라 특유의 보습이다. 이것은 일본에서도 보여 일본의 따비보습은 우리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극젱이에 사용된 극젱이보습은 따비보습이나 쟁기보습과는 달리 보습의 끝이 무디고 술이 곧게 내려간 것이 특징이다.

쟁기에 사용된 쟁기보습은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는 돌보습이 사용되었으며, 삼국시대가 되면서 금속제의 보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쟁기에 관한 기록이 있는 『삼국유사』 노례왕조(弩禮王條)에는 “쟁기보습 및 빙고를 만들고 수레를 만들었다(製犁耜及藏氷庫作車乘).”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나타난 나라에서 제작한 쟁기보습은 아마도 철제보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지증왕 3년(502) 봄에 고을 수령에게 명해 농사를 장려했고 소쟁기를 쓰기 시작하였다(智證麻立干三年春三月……分命州郡主勸農 始用牛耕).”는 기록도 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짧은 기록 외에는 당시 쟁기에 관한 또 다른 사실이 발견된 바는 없다. 몇몇 신라나 가야의 고분에서 철제보습이 출토된 예는 있었지만, 이들 보습이 실제 쟁기의 보습인지는 아직까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조선시대 이후의 우리나라 재래 쟁기의 유형은 술의 크기와 형태에 따라 선술쟁기[立底犁]·긴술쟁기·짧은술쟁기[短底犁]등으로 구분된다. 선술쟁기는 남한의 산간지방과 함경도에서 주로 사용된 것이며, 긴술쟁기는 선술형보다 발전된 유형으로 우리나라 전역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재래 쟁기가 이에 속한다.

경상북도 성주지방의 쟁기보습은 넓고 끝이 뾰족하며 속이 빈 보습에 술을 박아 넣고 그 사이를 여러 개의 쐐기로 고정시켰다. 경상북도 청송의 쟁기보습은 비교적 좁고 길며 한마루가 보습을 잡고 있는 고정방식이 특이하다.

함경남도 삼수(三水)의 쟁기보습은 청송의 쟁기보습과 유사한 형태이나 폭이 보다 좁고 길이가 길다. 전라북도 완주의 쟁기보습은 크고 넓으며 끝이 둥글게 되어 있다. 강원도 인제지방의 쟁기보습은 완주의 쟁기보습과 유사한 형태이지만 너비가 보다 좁은 편이다.

쟁기보습은 땅의 굳기나 쟁기의 형태에 따라서 모양과 크기가 약간씩 다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재래식 쟁기는 대체로 삼각형의 삽형보습이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동·서양(東·西洋) 쟁기의 기원(起源)과 발달(發達)」(박호석, 충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8)
「한국선사시대의 농경과 농구의 발달에 관한 연구」(길경택, 『고문화(古文化)』27, 한국대학박물관협회,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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