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 때 온폭[全幅]의 천을 사용하기 때문에 복건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복건(幞巾)이라고도 한다. 흑색 증(繒 : 여름에는 紗) 6자를 귀모양으로 만드는데, 드림을 뒤로 하여 머리에 쓰고 윗단으로 이마를 묶은 후 끈을 두 개 달아 머리 뒤쪽에서 잡아맨다. 이것은 본래 중국 고대로부터 관(冠)을 대신하는 간편한 쓰개였다.
후한 때 유행되었으나, 진나라와 당대에 이르러서는 은사나 도인의 아복(雅服 : 평상복)이 되었다. 그 뒤 송대에 와서 사마광(司馬光)이 복건과 심의(深衣)를 연거복으로 착용하였는데, 이를 주희(朱熹)가 ≪가례 家禮≫에 추거한 이후 유학자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조선시대에 주자학의 전래와 더불어 유학자들이 심의와 함께 유가(儒家)의 법복으로 숭상하여 착용하게 되었으나 그 모습이 매우 괴상하여 일반화되지는 못하였고, 소수의 유학자들에 의해서만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관례 때의 복장으로 초가(初加) 때 심의와 함께 사용되었고, 관례 뒤 흑립을 쓰기 전까지 초립(草笠)의 받침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뒤에는 남자아이의 돌에 장식적 쓰개로 쓰게 하여, 관례를 치르기 전까지 예모(禮帽)로 착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