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장치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으며, 탑은 2005년 새 국립중앙박물관 개관과 함께 용산으로 이전하려 했으나, 상태가 좋지 못하여 현 위치에 그대로 보존하게 되었다.
이 탑은 조선시대 광해군 때 왕세자의 만수무강과 부처님의 비호를 함께 기원하는 뜻에서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1620년(광해군 12)경 봉인사 부도암(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소재)에 세워졌던 것으로, 1927년 일본인들에 의하여 고베[神戶]로 반출되고 그 뒤 오사카[大阪]시립미술관에 보관되었다가 1987년 2월에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탑의 높이는 3.08m이며 삼국시대 이래 일반적으로 쓰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평면을 기본평면으로 삼았고, 기단은 상·중·하대를 갖추었으며 북[鼓]모양의 탑신(塔身) 위에 8각지붕과 길쭉한 상륜(相輪)을 얹어 전통적인 형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중대석(中臺石, 기둥돌)에 새겨진 구름, 당초(唐草), 꽃잎, 여의두문(如意頭文), 상대석 옆면 테두리 속의 당초문, 탑신부의 운룡문(雲龍文) 등에서 새로운 조형적 특색을 엿보게 한다.
특히 경사가 급한 지붕에 처마밑으로 서까래의 흔적을 남기고 윗면에 용머리를 새긴 수법이나 상륜부가 길쭉하게 올라간 형태, 그리고 왕릉의 호석(護石)처럼 주위에 난간과 궁판석을 돌린 방식은 이 탑이 불탑임에도 불구하고 조선 초기에 제작된 충주의 청룡사(靑龍寺)의 부도나 양주 회암사(檜巖寺)의 부도를 모방하여 조선 초기 부도양식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 탑의 탑신 윗면 한가운데에는 지름 19.4㎝, 깊이 9.8㎝의 사리공(舍利孔)이 나 있는데, 여기에서 8점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들은 외합(外盒)·내합(內盒)·사리병(舍利甁)·비단보자기 등으로, 대리석으로 만든 합이 1점, 은으로 만든 합이 2점, 놋쇠로 만든 합이 3점 그리고 금으로 만든 뚜껑이 있는 수정사리병 1점과 이를 쌌던 남색 비단보자기가 있다. 수정병에는 사리 1과(顆)가 들어 있었다.
발견 당시 외합 속에는 명주실과 비단·향(香)이 남아 있었으며, 은으로 만든 내합의 뚜껑에는 마름모형의 무늬를 볼록눌러새김의 수법으로 내고 그 안에 역동적인 운룡문을 장식하고 금박을 입혔다. 놋쇠로 만든 유제합(鍮製盒)은 주조된 것으로 그릇 표면은 녹로에 걸어 깎아서 면을 고르게 한 흔적이 뚜렷하다. 한편, 이들은 은제합보다 유난히 두껍고 투박하여 사리탑을 중수한 1759년 영조(英祖)대의 봉납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리석제 사리합에는 꽃봉오리가 홍색으로 채색되었고 덩굴은 흑색으로 그려진 이름모를 꽃이 등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한편 은제합의 밑바닥에는 넉 줄의 명기(銘記)와 함께 ‘萬曆四十八年庚申五月(만력48년경신5월)’의 글귀가 새겨져 이 유물이 1620년에 봉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합형(盒形) 사리장치가 주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에서도 그러한 형식을 잘 따르고 있다.
그러나 합형 사리장치는 두, 세 개를 사용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와 같이 일곱 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매우 독특한 법식이라고 하겠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탑과 사리장치 유물은 조선 초기 양식을 거의 변함없이 계승하고 있다.
또 사리합의 명문(銘文)과 탑의 내력을 새겨 탑 옆에 세운 비석의 글을 참조한다면 이 탑도 1620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도식화된 경향은 있어도 이와 같은 조선 중기의 유물이 조선 초기 양식을 반영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리고 길쭉한 상륜을 조성한 것이나 7점의 사리장치를 중복시킨 점 등은 왕실의 후원으로 독특하게 고안한 또다른 특성으로 보인다.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불탑임에도 불구하고 승려의 탑인 부도 형식을 모방한 독특한 형식으로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우수작이다. 또한 분명한 조성 연대를 지니고 있어 조선시대의 석조물과 사리장치를 연구하는 데에 편년자료를 제공하는 중요한 유물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