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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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작품
명대소설(明代小說) 소지현나삼재합(蘇知縣羅衫再合)을 번안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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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명대소설(明代小說) 소지현나삼재합(蘇知縣羅衫再合)을 번안한 소설.
내용

「소운전」·「소학사전」·「월봉산기」·「월봉기」와 같은 계열이다.

이들 번안작품들의 내용과 문체를 비교 검토하여 보면, 작품간의 선후관계가 대체로 드러난다. 이들 중 가장 먼저 이루어진 것이 「소운전」이며, 이를 확대 개작한 것이 「소학사전」이다. 「월봉산기」·「월봉기」는 이것을 부분적으로 첨삭, 부연, 개작한 것이다. 「봉황금」은 이들 작품을 대본으로 하여 신소설 문체로 개작한 것이다.

조동일(趙東一) 소장본 국문 사본(寫本) 2책이 있고, 1918년 회동서관(匯東書館) 발행의 국문 구활자본 상·하권이 있다.

「봉황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명나라 북경 순천부 신경 송학산 백운동에 나이 육십을 앞 둔 이부상서 장령의 미망인이 외아들 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윤은 16세에 조시랑의 딸과 혼인하였고 18세에 등과하여 한림학사, 대제학을 역임하고, 20세에는 흉년이 든 호남성 장사 태수로 임명된다.

윤은 임신 6개월인 부인 조씨와 함께 임지로 떠났다. 장령의 부인은 그때부터 매일 아들의 소식을 기다렸으나 임지로 떠난 윤은 16년간이나 소식이 없었다.

부인이 탄식과 절망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마침 남편의 기일에 한 과객이 부인의 곡성을 듣고 이 집에 들렀다. 그는 악주 숭양산 장수촌에 사는 마학의 아들 마용이란 청년으로, 나이는 16세이며 과거를 보러 상경하는 길이었다. 그의 부친 마학은 악행을 일삼는 수적(水賊)이나, 마용은 마음이 착하고 용모가 장윤과 흡사하였다.

장령의 부인은 마용의 용모를 보고 혹시나 하여 집안 내력과 나이며 생일을 물어 보았다. 나이와 생일은 며느리 조씨의 해산 시기와 일치하였으나 마학의 아들이라 하여 크게 실망하였다.

그러나 부인은 마용에게 은근히 정이 갔다. 그리하여 그가 떠날 때 아들의 거문고를 내 주었다. 거문고를 받아 든 마용는 그것이 자기 집에 있는 옥황금과 모양이 꼭 같다는 것에 놀랐다.

부인은 아들 윤이 뜰 앞의 오동나무를 베어 금봉(金鳳)·옥황(玉凰) 두개의 거문고를 만들고 장사 태수가 되어 집을 떠날 때 옥황을 가지고 갔다고 하였다. 마용은 아버지 마학이 장윤 부부를 해친 것으로 판단하고 무척 괴로워하였다.

마용은 과거를 보아 장원급제를 하였고, 흉년이 든 남방의 순무어사를 제수받았다. 남방을 순회하던 중 마용은 한 여인의 하소연하는 글을 받아 보게 된다. 그 여인은 곧 장윤의 처 조씨였다.

원정에 의하면, 장윤 부부가 부임하러 가는 길에 수적 마학을 만나 재물을 빼앗기고 장윤은 강물에 던져졌으며, 자신은 시녀와 함께 납치되어 갔다가 마학의 부하 권홍 내외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하여 여승이 되었고, 절간에서 아들을 낳았으나 부득이 길가에 버려야만 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마학을 꼭 잡아서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였다.

마용은 아버지 마학이 장윤 내외의 가해자임을 확인하였고, 자신이 바로 장윤의 아들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마용은 곧 장수촌으로 가서 권홍 내외로부터 마학이 장윤 내외를 해친 일과 조씨를 도망가게 한 일, 마학이 길에서 주워온 마용을 길렀다는 말을 들었다. 이들은 아이와 함께 싸여 있던 생년월일을 적은 단자와 금봉채도 내놓았다.

비로소 모든 사실을 확인한 마용은 자신의 성명을 장진으로 고치고 우여곡절 끝에 죽은 줄 알았던 부친 장윤을 만나고 이어서 모친 조씨도 찾게 되었다. 또 친부로 알았던 마학을 사로잡아 가두었으나 천자께 상소하여 목숨은 살리고 옥문관으로 귀향을 보냈다. 그리고 부모와 함께 고향 백운동으로 돌아가 조모를 만나고 부귀공명을 누렸다.

「봉황금」은 신소설 문체로 쓰여졌으며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였다. 회상의 기법을 썼으며, 작품 가운데서 자주 “독자시여”로 시작하여 작자의 주견을 내세워 설교를 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고소설과 신소설 공존기에 「소운전」을 개작한 작품임을 알 수가 있다. 과도기적 작품으로, 문체와 표현기법 등이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참고문헌

「‘소지현나삼재합’계 번안소설연구」(서대석, 『동서문화』5, 계명대 동서문화연구소,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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