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전에는 관부(關釜)연락선이라 불렸다. 1905년 1월 1일부터 열차가 운행되기 시작한 경부선과 같은 해 9월 정기 뱃길을 연 부관연락선이 운행을 시작하였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수탈시스템의 하나로 탄생한 것은 분명하지만 경부선과 관부연락선 개통이 부산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두 교통망은 당시 한국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 중대한 요소였는데, 부산은 유일하게 두 교통망의 기 · 종착점을 동시에 보유했기 때문이다.
‘부관’(釜關)이라는 이름은 부산의 앞글자(釜, 부)와 시모노세키의 뒷글자(關, 관)를 딴 것이다. 일본에서는 종종 어순을 바꾼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또는 관부항로(關釜航路)라고 부른다.
관부연락선은 1905년 9월 일본이 본격적으로 한국을 비롯한 중국의 동북지방 · 몽고 등지로 진출하기 위하여 만든 국책해운회사였던 산요기선주식회사(山陽氣船株式會社)에 의하여 처음 개설되었다.
이 연락선은 시모노세키와 고베[神戶] 사이의 산요선, 고베와 도쿄[東京] 사이의 도카이도선(東海道線) 등 일본의 철도와 연결되고, 우리나라에서는 경부선 · 경의선 그리고 만주의 안봉선(安奉線) · 남만주철도 · 시베리아철도 등과 연결되어 광복 전에는 세계일주 여행로의 일부를 이루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그러나 이 연락선은 일본의 한국 침략의 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징용으로 끌려갔으며 일본인들의 수탈에 농토를 잃고 북해도 탄광으로 가기 위하여 관부연락선에 몸을 맡겨야 하였다. 최초로 취항한 연락선은 이키마루(壹岐丸, 1,680톤)라는 배로 11시간 반이 소요되었다.
그 뒤 3,000톤급의 쇼케이마루(昌慶丸) · 도쿠주마루(德壽丸) · 쇼토쿠마루(昌德丸) 등이 운항되었다. 1935년부터는 북중국 · 만주 · 몽고 등지로의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여객과 화물의 격증에 대비하여 당시로서는 최신예인 7,000톤급의 대형 여객선 공고마루(金剛丸) · 고안마루(興安丸) 등을 운항하였으며 시간도 7시간 반으로 단축하였다.
이들 연락선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징발하고, 전선과 일본 본토를 운항하는 데 투입되었으나, 미군에 의하여 격침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1945년 3월부터 사실상 관부연락선은 두절되었으며, 그 뒤 광복이 된 뒤에도 한일 간의 국교가 정상화될 때까지 연락선이 오가지 못하였다.
광복 후에 일본까지 다니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첫 여객선은 아리랑호로 1964년 1월 부산항 제2부두를 떠나 처음으로 일본으로 갔다. 1970년 6월 17일부터는 부산과 시모노세키까지 이틀에 한 번씩 오가는 부관페리호가 다니기 시작하였다. 연락선이라는 명칭은 협의로는 일제강점기 및 그 이전의 일본측 노선을 의미하지만, 이 항로를 이어받아 운행하는 현재의 부관페리를 부관연락선이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 운행중인 부관페리호는 1970년부터 부산에서 시모노세키까지 240km를 운행하고 있다. 2009년 현재 부관페리는 부관훼리주식회사에서 운행하고 있으며, 1998년에 도입된 일본 국적의 1만 6187톤 하마유(Hamayuu)호 1척과 2002년에 도입된 한국 국적의 1만 6665톤 성희(Seonghee)호가 각각 1일 1회씩 운항하고 있다. 즉 부산에서 저녁 8시에 출발하면 시모노세키에서는 저녁 7시에 출발한다.
부관연락선은 우리나라와 외국을 연결하는 유일한 여객전용 연락선으로 우리나라와 일본을 오가는 관광객 수송에 큰 몫을 하고 있다. 또한 세계화시대를 맞이하여 국가와 국가 간의 월경적협력의 중요성과 더불어 월경적 개발사업이 활발해지면서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부산과 일본의 긴밀한 연결관계가 더욱 중요한 사안으로 대두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제2의 도시인 부산과 일본 주요 도시간의 협력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부관연락선(부관페리)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교류협력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