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삼본화엄경은 동진(東晉)의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가 번역한 60권의 『화엄경』 진본(晉本)과 당나라 무주(武周) 때의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80권의 『화엄경』 주본(周本), 당나라 정원(貞元) 연간에 반야(般若)가 번역한 40권의 『화엄경』 정원본(貞元本)을 일컫는다. 3종 634판이고 현재 부석사에 소장되어 있다.
이 삼본의 각판수는 일제시대 사찰 보수 때에는 674판이고, 1976년 조사 때에는 639판이었으나, 1982년 보물로 지정하기 위하여 조사할 때에는 진본 화엄경판 239판 472장(22장 缺), 주본 화엄경판 273판 538장(53장 缺), 정원본 화엄경판 122판 240장(18장 缺) 등 634판으로 집계되었다. 이 각판은 원래 고려 때 새긴 원판과 조선 때 새긴 보판으로 혼성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근래 새로 발굴된 동판본계의 진본 권제11∼13, 권제14∼15의 2책 호접장본을 보면, 현 각판에서 찍은 책보다 정각(精刻)이어서 재검토의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우리나라에 보급된 『화엄경』은 매항(每行) 14자의 초조정장(初雕正藏)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 매항 17자 뿐인데, 이 부석사 각판만은 유독 ‘자세자밀(字細字密)’의 무주(無註) 34자이다.
학계에서는 원종 · 충렬왕 때의 고승인 복암(宓庵)이 「안본대장경찬소(丹本大藏經讚疏)」에서 ‘지박자밀(紙薄字密)하여 부질(部帙)이 간경(簡輕)하다'고 언급한 경의 계통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복암이 언급한 것의 현존 세자무주 17항 34자 주본 권제1∼10 및 진본 권제30∼40(결락본)과 새로 발굴된 진본을 대사해보니 그것의 첫 번각임이 뚜렷하게 실증되었다. 그리고 일제시대 조선총독부가 이 부석사 각판에서 2부를 찍어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이관한 삼본과 면밀히 대사해본 결과, 위의 첫 번각본을 바탕으로 다시 새겨낸 중번각이며, 여기에 추각(追刻)한 보판이 섞여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에서의 초 · 중 번각시기는 간기(刊記)가 나타나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거란장경이 1063년, 1099년, 1107년에 세 차례 수입되었는데, 그 중 일차의 것은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高麗國新雕大藏校正別錄)』에 의할 때 매항 17자본으로 확인되기 때문에 2·3차의 것 중 하나가 ‘지박자밀’의 세자무주 34자본에 해당될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볼 때 첫번째 번각시기는 넓게 잡아 12세기 이후로 추정할 수 있는데, 부석사의 사세(寺勢)가 희종의 다섯째 아들인 충명국사(冲明國師) 각응(覺膺)이 주지직에 있을 때 크게 번창하였음을 감안하면 그 하한은 13세기 중엽 무렵까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번각은 장정까지 거란 원본을 모방하여 호접장으로 꾸몄음이 그 특징이다.
두 번째의 번각은 첫 번각본을 바탕으로 새기고 각수명을 군데군데 표시하였으나 그 시기는 표시하지 않았다. 판각기법이 훨씬 떨어지는 점으로 미루어 넓게 고려 말 조선 초기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현전본에 의하면 새로 판서본(板書本)을 써서 보각한 것이 여기저기에 혼입되어 있다. 그 중 진본 권제32의 9장에 해당하는 각판에는 ‘융경2년(선조 1, 1568) 무진 정월일 경상도 영천지 태백산 부석사 개판(隆慶二年戊辰正月日慶尙道永川地太白山浮石寺開板)’이 새겨져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에는 그 책장이 결락되었지만, 현 각판에는 그 개판기록에 이어 시주자들과 서사자(書寫者)인 황언경(黃彦卿), 각수인 인천(印天), 연판자(鍊板者)인 불명(佛明)이 표시되어 있다. 책 중의 보각에는 여기에 표시되지 않은 각수명이 나타나고 있는 점으로 보아, 1568년 이전에도 경판의 일실 또는 마손으로 인하여 보각이 일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부석사의 각판은 두 번째의 번각에 보판이 섞인 것으로 결판이 많이 생겼지만, 거란본계 세자무주의 34자본은 오직 이 부석사 각판만이 전래되고 있으므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