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논산시, 서쪽은 서천군 · 보령시, 남쪽은 금강을 경계로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북쪽은 공주시 · 청양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6°44′∼ 127°03′, 북위 36°04′∼ 36°23′에 위치한다. 면적은 624.57㎢이고, 인구는 7만 1143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15개 면, 433개 행정리(191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있다.
서북쪽은 차령산맥의 여맥이 지나 산지를 이루며 남동쪽은 차차 높이가 낮아져 금강 유역에서는 평야가 발달되었다.
북서쪽에 성대산(星臺山, 631m) · 아미산(峨嵋山, 577m) · 월명산(月明山, 544m) 등의 산이 솟아 있고, 중남부에 성흥산(聖興山, 268m)과 서부에 만수산 · 노고산 · 석천산 등이 연이어 있다.
금강이 군의 동부에서 곡류하여 남쪽으로 흐른다. 금강 유역에는 넓은 범람원이 발달되어 있다. 특히 금강의 서쪽에 있는 구룡평야는 땅이 기름지고 관개시설도 잘 되어 있어 군내 최대의 곡창지대를 이룬다. 이 밖에 금천(金川) · 구룡천(九龍川) · 은산천(恩山川) · 석성천(石城川) 일대에도 비옥한 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논의 토양은 남부금강저지계(南部錦江低地系)에 속하는 부여통(扶餘統)이고, 밭의 토양은 충남하성토지계(忠南河成土地系)에 속하는 금강갈색토통(錦江褐色土統)으로 사양토와 사토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세미사(細微砂)가 많이 포함되어 있고, 부식(腐植)과 질소가 약간 부족하며 산도(酸度)가 약한 편이다. 암석은 주로 화강편마암과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서해안이 인접한 관계로 해풍의 영향을 받아 대륙성기후의 특징이 보이지 않는다. 연평균 기온은 12.9℃, 1월 평균기온 -0.2℃, 8월 평균기온 25.5, 연 강수량은 1,420㎜이다. 평균초빙일은 11월 11일경, 평균 해빙일은 3월 28일경으로 서울에 비해 약 2주일의 차이를 보일 만큼 따뜻한 곳이다.
1975년에 발굴, 조사된 초촌면 송국리 선사취락지는 농경생활을 하던 청동기문화인의 유적으로는 최대 규모이다. 이곳에서는 주거지를 비롯해 민무늬토기 · 간석기 · 돌널무덤 등이 발굴되었으며, 탄화미도 발견되어 벼농사의 기원을 무문토기문화와 확실하게 연결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또, 이곳과 연관성이 있는 초촌면 산직리와 규암면 · 은산면 · 충화면 · 석성면 등지에 고인돌을 비롯해 청동기시대의 많은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초산국(楚山國)이 이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부여군은 백제시대의 소부리(所夫里) · 대산홀(大山忽: 지금의 鴻山) · 가림홀(加林忽: 지금의 林川) · 진악산(珍惡山: 지금의 石城)에 해당된다. 특히, 부여읍 일대는 소부리 혹은 사비(泗沘)라고 했으며, ‘부리’라는 말은 ‘밝다’, ‘붉다’ 등에서 나왔다고 한다.
538년(성왕 16)에 백제는 웅진(熊津)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바꾸었다. 그 뒤 6대에 걸쳐 120여 년 동안 백제의 수도로서 전성기를 누렸다. 번성기에는 가구수가 13만여 호에 달했으며, 이 시기에 문화의 꽃을 피웠다.
백제가 멸망한 뒤 신라의 문무왕이 총관을 두었고 686년(신문왕 6)에는 사비주를 군으로 삼았으며, 경덕왕 때 웅천주를 웅주로 고치면서 부여를 그 속군으로 하였다. 이때 석산현(石山縣: 지금의 석성) · 열성현(悅城縣: 지금의 청양군 정산면) 등이 부여군의 속현이 되었다.
신라 말에는 후백제의 영역이었다가 고려 태조가 후백제 신검의 항복을 받고 후삼국을 통일한 뒤 곧 고려의 영역이 되었다. 그 뒤 성종 때 하남도(河南道)에 예속되었고, 예종 이후에는 청주목의 속군인 공주에 속하여 부여군이라 하였다.
현종 때는 일시 현으로 강등되기도 했으며, 1028년(현종 19)에는 정림사(定林寺)가 중건되었다고 한다. 고려 말엽에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는데, 1376년(우왕 2)에 최영(崔瑩)이 홍산면 일대에서 왜구를 크게 토벌하였다.
건국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채택해오다가 태종 때 팔도제(八道制)를 정비하면서 공주목의 속현이 되었다. 부여군은 부여현 · 홍산현 · 임천군 · 석성현으로 나뉘어 있었고, 4개 군현에 각각 향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6개의 사액서원을 비롯해 많은 서원 · 사우가 세워졌다.
1895년(고종 32) 팔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로 구획하면서 공주부 관하의 부여군으로 승격하였다. 1896년 13도제로 변경했을 때 충청남도의 군이 되었다. 1914년 부 · 군통합령의 실시로 홍산 · 임천 전 지역과 공주의 일부 지역을 편입해 16개 면을 관할하였다.
1960년 1월 1일 부여면이 읍으로 승격했으며, 1973년 7월 1일 석성면 현북리가 부여읍에, 장암면 사산리가 세도면에 편입되는 행정구역 조정이 있었을 뿐 큰 변화는 없다.
백제의 옛 도읍지로서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는 지역이다. 선사시대의 유적으로 초촌면의 부여 산직리 지석묘(충청남도 기념물, 1982년 지정)를 비롯해 부여읍 · 구룡면 · 규암면 · 은산면 · 초촌면 등지에 기반식 및 탁자식 고인돌이 산재해 있다.
또, 군내에서 간돌화살촉 · 간돌검 · 돌도끼 · 세형동검 · 칼자루끝장식 등 많은 청동기시대 유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초촌면의 부여 송국리 유적(사적, 1976년 지정)에서는 1974년 요령식 동검 · 간돌검 · 간돌화살촉이 돌널무덤에서 출토되어 청동기문화의 상한선을 밝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주거지는 원형과 직사각형의 형태로 무리지어 취락을 형성했음이 확인되었다.
백제시대의 일반유적으로는 부여 구아리 백제유적(충청남도 기념물, 1993년 지정) · 부여 용정리 소룡골 백제건물지(충청남도 기념물, 1922년 지정) · 궁남지(사적, 1964년 지정) · 관북리 유적(사적, 2001년 지정)등이 있다.
또한, 부여읍의 부여 쌍북리 요지(사적, 1963년 지정) · 부여 쌍북리 북요지(충청남도 기념물, 1982년 지정), 장암면의 부여 정암리 와요지(사적, 1992년 지정) 등의 요지가 남아 있으며, 백제시대 재상을 선출하던 장소로 알려진 천정대(충청남도 기념물, 1984년 지정)가 규암면 호암리에 있다.
고분으로는 능안골 고분군(사적, 2000년 지정)을 비롯해 외산면의 부여 지선리 고분군(충청남도 기념물, 1992년 지정), 구룡면의 부여 태양리 백제석실고분(충청남도 기념물, 1984년 지정) 등이 발굴되었다.
산성으로는 남쪽에서 부여로 들어오는 관문이자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군이 용전한 임천면 군사리의 부여 가림성(사적, 1963년 지정), 백제 도성의 일부였던 부여읍 쌍북리의 부여 부소산성(사적, 1963년 지정) · 부여 청산성(사적, 1963년 지정), 백제산성으로는 최대 규모인 부여읍 능산리의 부여 청마산성(사적, 1963년 지정), 은산면 은산리의 은산당산성(충청남도 기념물, 2000년 지정) 등이 있다.
또, 궁성의 외성인 부여읍 염창리의 부여 나성(사적, 1963년 지정), 석성면 현내리의 부여 석성산성(사적, 1963년 지정), 규암면 신성리의 증산성(사적, 1967년 지정), 홍산면 북촌리의 홍산태봉산성을 비롯해 부산성 · 외리산성 · 반산성 등이 있다. 홍산태 봉산성은 2000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한편, 부여부소산성에는 사자루(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 수북정(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 영일루(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 백화정(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 군창지(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 낙화암(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등과 팔각정(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등의 문화유산이 있다.
불교 유산으로는 부여읍 동남리의 부여 정림사지(사적, 1983년 지정)에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 ·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이 있고, 임천면 구교리의 대조사(大鳥寺)에는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1963년 지정) · 대조사 석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이 있다. 부여 부소산성에는 부여 부소산성 서복사지(충청남도 기념물, 2004년 지정) · 고란사(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등이 있다.
고려 초 창건된 외산면 만수리의 무량사(無量寺)에는 무량사 극락전(보물, 1963년 지정) · 무량사 오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무량사 석등(보물, 1963년 지정) · 무량사 미륵불괘불탱(보물, 1997년 지정) · 무량사 김시습 부도 · 무량사 당간지주 · 무량사 오층석탑 출토유물 · 무량사 동종 · 무량사 극락전 후불탱 · 무량사 지장보살 및 시왕상 일괄 · 무량사 삼전패 · 무량사 명부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2004년 지정) · 무량사 구지(충청남도 문화재자료, 2002년 지정) · 무량사 극락전 삼장보살탱(문화재자료, 2002년 지정)등이 보존되어 있다. 무량사 김시습 부도는 1973년에, 무량사 당간지주는 1976년에, 무량사 오층석탑 출토유물은 1983년에, 무량사 동종과 무량사 극락전 후불탱은 2002년에, 무량사 지장보살 및 시왕상 일괄과 무량사 삼전패는 2004년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 부여읍 관북리 부여박물관 내에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보물, 1963년 지정) · 부여 석조(보물, 1963년 지정) · 박물관 석조여래입상(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 박물관 석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이 보관되어 있으며, 부여읍에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 1997년 지정) ·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국보, 1996년 지정) · 동남리 석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 부여 석목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 · 금성산 석불좌상(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 등이 있다.
또, 장암면의 부여 장하리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초촌면의 부여 세탑리 오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 석성면의 현내리부도(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 홍산면의 부여 홍양리 오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974년 지정) · 부여 홍산 상천리 마애불입상(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992년 지정), 규암면의 금암리 오층석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외산면의 화성리 오층석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세도면의 동사리 석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충화면 오덕리에 오덕사 괘불탱(보물, 2002년 지정) 등이 있다.
절터로는 부여읍에 용정리 사지(충청남도 기념물, 1984년 지정) · 동남리 사지(충청남도기념물, 1984년 지정) · 동남리 전 천왕사지(충청남도 기념물, 1985년 지정) · 중정리 백제건물(충청남도 기념물, 1985년 지정) · 임강사지(충청남도 기념물, 1982년 지정) · 부여 군수리 사지(사적, 1963년 지정) 부여능산리사지(사적, 2001년 지정) · 화지산 유적(사적, 2001년 지정) 등이 있으며, 군수리 사지에 있던 군수리 석조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 · 군수리 금동보살입상(보물, 1963년 지정)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겼다.
이 밖에도 은산면 금곡리의 금강사지(사적, 2001년 지정), 규암면 호암리의 호암사지(충청남도 기념물, 1982년 지정)와 신리의 왕흥사지(사적, 2001년 지정), 임천면 가신리의 부여 보광사지(충청남도 기념물, 1995년 지정) 등이 남아 있다.
유교 유산으로는 부여읍 동남리의 부여향교(충청남도 기념물, 1997년 지정), 석성면 석성리의 석성향교(충청남도 기념물, 1997년 지정), 홍산면 교원리의 홍산향교(충청남도 기념물, 1997년 지정), 임천면 군사리의 임천향교(충청남도 기념물, 1997년 지정) 등이 있다.
서원으로는 임천면 칠산리의 칠산서원(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만사리의 퇴수서원(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세도면 동사리의 동곡서원(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부여읍 저석리의 창강서원(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규암면 진변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등이 있다.
사우 · 사당으로는 구룡면 금사리의 창렬사(충청남도 기념물, 1979년 지정)를 비롯해 백제 충신 성충(成忠) · 흥수(興首) · 계백(階伯)을 모신 부여읍 쌍북리의 삼충사(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허목(許穆) · 홍가신(洪可臣) · 채제공(蔡濟恭)의 위패를 모신 부여읍 관북리의 도강영당(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장암면 장하리의 흥학당(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987년 지정), 점상리의 덕림병사(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8년 지정), 남면 동절사(향토문화유산)가 있다.
이 밖에 백제의 충신인 성충 · 흥수 · 계백과 고려 공민왕 때 신돈(辛旽)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유배되어 죽은 이존오(李存吾) 등 4인을 제향하기 위해 1576년(선조 9) 세운 부여읍 동남리의 의열사(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외산면 무량사에서 입적한 김시습(金時習)을 배향하기 위해 건립해 1704년(숙종 30)에 사액을 받은 홍산면 교원리의 청일사(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가 있다. 규암면 모리에는 민입암집 판각(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95년 지정) 등이 남아 있다.
관아 건물로는 부여읍 관북리의 부여동헌(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 홍산면 남촌리의 홍산동헌(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992년 지정), 북촌리의 홍산 형방청(충청남도 유형문화재, 2004년 지정), 석성면 석성리의 석성동헌(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987년 지정) 등이 있고, 1836년(헌종 2)에 건립된 홍산면 북촌리의 홍산객사(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가 있다.
능묘는 고려 말의 명신 김거익의 묘(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인조 때의 황일호의 묘(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세종 때의 공신 전득우의 묘(충청남도 기념물, 1980년 지정), 병자호란 때 순절한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인 윤집(尹集)의 묘, 조신의 묘(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등이 있다. 이외 관북리의 유경종묘내의 유물(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이 있다.
비로는 부여박물관 내에 부여 당 유인원 기공비(보물, 1963년 지정) · 사택지적비(보물, 2014년 지정), 홍산면 북촌리에는 1681년(숙종 7) 흥사면 북촌리에 세운 홍산 만덕교비(충청남도 기념물, 1973년 지정), 옥산면 상기리에 가교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충화면 오덕리에 선조대왕 태실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부여읍 동남리에 의열사비(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976년 지정) 등이 있다.
이 밖에 규암면 진변리에 인조 때의 문신 이경여(李敬輿)를 기리는 부산각서석(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976년 지정)이 남아 있다.
고가옥으로는 부여읍 중정리의 부여 여흥민씨 고택, 군수리의 부여 군수리 고택 등이 있다. 이 밖에 규암면 진변리의 부산(浮山) 기슭 백마강변에는 대재각(大哉閣)이 있다. 부여 여흥민씨 고택과 부여 군수리 고택은 1984년 중요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 홍산면 조현리에 부여 김동효 영정(충청남도 유형문화재, 2000년 지정) · 부여 계성군 영정(충청남도 문화재자료, 2000년 지정)이 있으며, 동남리에 부여 천진전 단군화상(충청남도 문화재자료, 2000년 지정)이 있다.
구룡면 금사리에 금사리 성당(충청남도 기념물, 1998년 지정)이 있다.
교원리의 보부상 유품(중요민속문화재, 1980년 지정)이 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용당리의 부여 용당리 우물(충청남도 문화재자료, 2004년 지정), 내산면 저동리의 저동리 쌀바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2000년 지정), 또한, 부여읍 구교리에 부여 구드래 일원(명승, 2009년 지정) 등이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은산면 은산리의 은산별신제(국가무형문화재, 1966년 지정), 내지리의 내지리 단잡기(충청남도 무형문화재, 2000년 지정), 부여읍 관북리의 산유화가(충청남도 무형문화재, 1982년 지정), 용정리의 용정리 상여소리(충청남도 무형문화재, 1997년 지정), 정동리의 내포제시조(충청남도 무형문화재, 1992년 지정), 세도면 동사리에 세도두레풍장(충청남도 무형문화재, 2000년 지정)이 전승되고 있다.
부여 내산면의 주암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1982년 지정), 외산면 수신리에 부여 수신리 반송(충청남도 기념물, 2002년 지정), 규암면 진변리에 백강(白江)의 부여동매(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고란초(皐蘭草) 등이 보호되고 있다.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부여향교 · 석성향교(石城鄕校) · 임천향교(林川鄕校) · 홍산향교(鴻山鄕校) 등과 1576년에 의열사, 1621년에 청일사, 1687년에 칠산서원, 1693년 봉호서원(鳳湖書院), 1717년 창렬사, 1719년에 부산서원이 세워져 1868년 9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될 때까지 존속되어 지방유생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가 강점된 1910년을 전후하여 지방 유지들이 국권회복을 하려면 교육을 진흥시키는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 지방 유지들이 사립학교를 설립하였다. 김상찬(金相贊)이 동창학교(東彰學校)를, 박동익(朴東翼)이 신명의숙(信明義塾)을, 손창근(孫昌根)이 건명학교(建明學校)를, 정영태(鄭永泰)가 창영학교(彰永學校)를 각각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학교는 1915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었다. 반면, 1911년 부여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1920년대 이후의 1면 1교정책에 의해 각 읍 · 면에 공립보통학교가 세워졌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5개교, 중학교 11개교, 고등학교 5개교와 한국전통문화학교가 있다.
사회 · 문화 기관으로는 군립도서관이 교육 · 문화 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으며, 부여문화원이 향토문화의 계승 · 발전에 노력하고 있다. 한편, 은산별신제보존협회가 격년으로 3∼4월에 별신제를 거행하고 있으며, 국립부여박물관은 유물 · 유적의 발굴 및 보전에 앞장서 있다.
백제문화선양위원회에서는 충청남도가 주최가 되어 행하는 백제문화제를 공주시와 격년으로 주관하고 있다.
중요한 민속놀이로는 윷놀이 · 널뛰기 · 횃불놀이 · 연날리기 · 그네뛰기 · 씨름 · 고누 · 닭잡기놀이 · 숨바꼭질 · 군사놀이 · 비석치기(돌치기) · 각시놀이 · 봉화 및 초촌면 추양리의 두레농악 등이 있다.
이 중 봉화는 각호(各戶)에서 짚이나 땔나무 한 다발씩을 동구로 가지고 가 큰 나무다발을 만든 다음 거기에 불을 붙여놓고 각자의 재수를 빌며 노는 놀이였으나 지금은 전승되지 않고 있다. 각시놀이는 소녀들이 풀로 각시인형을 만들어 시집보내는 모양을 흉내내는 놀이이다.
추양리 두레농악은 가는풍장 · 두레풍장 · 꽃나비풍장으로 이루어진다. 가는풍장은 본격적인 농사철이 되어 두레농악대가 구성되면 당산(堂山)에 집합하여 영기를 앞세우고 작업장으로 행진하면서 치는 것으로 자진마치 · 세마치의 리듬으로 되어 있다. 두레풍장은 작업을 시작하면서 치는 것으로 자진마치로 시작되어 점점 박자가 빨라진다. 꽃나비풍장은 칠월칠석날에 마을의 공동작업을 마친 뒤 농악놀이와 씨름판을 벌이면서 치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동제는 은산별신제로, 은산면 은산리와 신대리 사람들이 격년으로 이른 봄에 거행하는 큰 굿이다. 은산리 북방 당산(堂山) 아래에 있는 별신당에는 산신상(山神像)과 복신장군상(福信將軍像), 그리고 토진대사상(土進大師像)이 봉안되어 있다.
복신장군과 토진대사는 백제부흥을 위해 싸우다 죽은 인물로, 별신제는 이 두 인물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행하는 것이다. 이 별신제는 14일간 진행되는데 진대베기, 꽃받기, 별신올리기, 행군과 주원, 별신내리기와 하당굿, 독산제, 장승제의 순서로 펼쳐진다.
이 고장은 백제의 도읍지였던 관계로 백제 망국과 관련된 설화가 많이 전해 오고 있다. 「조룡대전설(釣龍臺傳說)」은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할 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마강을 수호하는 호국룡(護國龍)을 말을 미끼로 낚아 무사히 강을 건너 백제를 공격했다는 내용이다. 현재 조룡대 위에는 소정방이 용을 낚아 올리느라 힘을 쓸 때 패었다는 밧줄자국이 남아 있다.
그런가 하면 백제가 망할 조짐을 미리 예견했다는 설화도 전한다. 신라의 백제 침공이 있기 직전 한 동자(童子)가 백제의 도성을 다니며 “신라승백제망(新羅勝百濟亡)”이라는 예언을 외우고 다녔는데, 그를 따라가 보니 마래방죽으로 들어가 자라로 변신했다는 내용의 설화가 그것이다.
「자온대전설(自溫臺傳說)」 역시 백제시대의 것이다. 평소 임금이 경관이 좋은 자온대에 행차하기를 즐겼는데, 이것을 안 신하가 임금이 따뜻한 바위에 앉아 놀 수 있도록 미리 불을 피워 바위를 따뜻하게 했다는 데서 유래한 그 이름이 자온대라 전한다.
한편, 민중영웅담인 「이몽학전설(李夢鶴傳說)」이 있다. 조선 선조 때의 이몽학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농민들을 규합하여 혁명을 시도, 홍성지방까지 점령했으나 결국 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패한 것은 그보다 지모가 뛰어난 누이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몽학을 낳을 때는 그 어머니가 장구를 치며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꾼 데 비해 그 누이를 낳을 때는 하늘을 자유로이 오르내리는 꿈을 꾸어서 동생보다 더 뛰어났다고 하는데, 이몽학이 이 누이의 말을 무시하는 바람에 실패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밖에 백제의 부흥운동을 하다가 분사한 장군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는「은산별신제유래담」과, 호랑이로 변해 개를 잡아다가 어머니의 병간호에 효성을 다했다는 「호랑이황팔도설화」등이 전해지고 있다.
이 지방은 백마강을 끼고 평야가 펼쳐져 있어 벼농사를 많이 짓기 때문에「긴모심기소리」 · 「자진모심기소리」 · 「긴김매기소리」 · 「자진김매기소리」 · 「타작소리」 · 「벼부치는소리」 등의 농요가 많이 전승되고 있으며, 바다와 가까운 쪽에는 약간의 어요가 전해 오고 있다. 또, 「길쌈노래」 · 「시집살이노래」 · 「부모노래」 · 「달노래」 같은 부녀요와 장례 지내는 절차에 「상여소리」도 불러오고 있다.
부여지방의 모심기소리는 「산유화가」라 하여 농민들의 생활감정을 두루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노랫말에 백제 패망의 비애를 절실히 담고 있어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며, 이 고장의 향토성과 역사성을 잘 반영한다.
“산유화야 산유화야/ 사비강 맑은물에/ 고기잡는 어옹들이/ 온갖고기 다잡아도/ 경칠랑은 낚지마소/ 강상풍월 좋을시고/ 헤헤헤 아하 헤헤/ 헤헤헤헤여로 상사듸요/ 산유화야 산유화야/ 이런일이 웬말이냐/ 용(龍)머리를 생각하면/ 구룡포(九龍浦)에 버렸으니/ 슬프구나 어화벗님/ 근국충성 못다했네.”
세련된 가사로 백마강의 승경을 멋스럽게 노래하면서 백제 역사의 이러저러한 일들을 회고적으로 읊고 있는 이 민요는 예로부터 널리 알려져 있고,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입상하기도 하였다.
이 「긴모심기소리」는 중모리장단에 가까운데, 뒷소리가 딸리는 장절형식으로 되어 있고 선소리꾼이 앞소리를 네 장단 메기면 농군들이 두 장단에 ‘헤헤헤 아하 헤헤 헤헤헤헤여로 상사듸요’ 하고 받는다. 선율은 육자배기토리로 되어 있으나 전라도 상사소리와 약간 다른 향토적인 가락으로 되어 있다.
「자진모심기소리」는 모심기 끝판에 부르는 소리로, 중중모리장단으로 되어 있어 좀 빠르고 소리도 짧다. 뒷소리는 ‘어화어화 상사듸여’로 되어 있고 막판에 빨리 몰아가면 흥겹기 그지없다.
「김매기소리」는 「덩어리소리」라 하여 먼저 느린 소리로 ‘에하 덩어리’하고 경토리에 가까운 화평스러운 가락으로 유장하게 메기고 받는다. 그리고 김을 매다가 ‘어화덩이’하고 중중모리장단으로 몰아가며 흥겹게 메기고 받는다. 막판에는 둥글게 싸며 ‘어화덩이’하고 자진모리장단으로 몰아가면서 메기고 받는 것이 구성지고 씩씩하다.
개상질로 타작하는 「타작소리」는 「바심소리」라 하여 세마치장단으로 ‘에야에헤’하고 뒷소리를 받으며 씩씩하게 부르는데 가락과 손발짓이 맞아떨어진다. 「벼부치는소리」는 「나비질소리」라 하여 돗자리를 펄럭여 벼의 먼지를 날리며 중모리장단으로 ‘헤헤헤여라 술비야’하고 뒷소리를 부르는 특이한 민요이다.
강을 따라 바다로 통하는 입포(笠浦) 쪽에서는 「어로요」가 불린다. 그물을 올리면서 느리게 “어여디여 어여디여차/ 어기야디여 어여디여/ 칠산연평 있는고기는/ 우리집그물로 다들었구나.” 하고 힘찬 가락으로 메기고 받는다.
부녀요로 대표적인 것은 역시 「달노래」이다. “나무하나 캐다가서/ 기장밭에 심었더니/ 가지가지 열두가지/ 한가지는 해가열고/ 한가지는 달이열고……”라는 노랫말로 부녀자의 생활체험과 정서를 동요다운 감성으로 순박하게 잘 담아 부르고 있다.
이 군의 총경지면적은 194.88㎢로 논이 149.08㎢, 밭이 45.80㎢이다.농가 1가구당 경지면적은 약 1.573㏊이다. 이들 지역에는 반산저수지 · 복금저수지 · 옥산저수지, 그리고 금강과 백마강이 농경지에 관개용수를 제공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 · 보리 · 야채 · 인삼 · 잎담배 등이 있다. 서천군과 인접한 지역에서는 모시가 많이 생산되고, 금강 연안에서는 수박 · 참외 등의 산출이 많다. 특히, 인삼 은 6·25전쟁 뒤 개성에서 피란 나온 사람들이 재배하기 시작한 것으로 이 곳의 기후와 토양이 인삼 재배에 적합하고 환금작물(換金作物)로 유리하기 때문에 군내 각지에서 재배되었다. 군내의 인삼 재배면적은 약 1,650㏊이며, 생산량은 약 1만 3000㎏에 달한다.
이 군에는 124개의 광산이 있으나, 현재 가행중인 광구는 석탄광구 10여 곳과 비금속광구 한 곳이 있다. 석탄광의 대부분은 외산면과 내산면에 집중되어 있으며, 부여읍에는 전매청 홍삼제조소와 민간경영의 성냥공장이 있다. 이곳은 백제 때부터 금강수운을 이용해 중국 · 일본과 교역을 해온 중심지였다.
상업활동으로는 1830년경에 면포 · 포시 · 담배 · 소 · 담수의 거래로 유명한 1·6일의 은산장, 모시 · 홍시 · 게 · 담배 · 광어 · 조기로 알려진 5·10일의 임천장, 그리고 3·8일의 부여장, 2·7일의 홍산장 등이 있었다. 각 장시는 서천 · 한산과 인접하고 있어 어느 곳이나 모시의 거래가 공통적인 특색이었다. 특히, 홍산에는 모시 보부상의 전통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규암장이 군내 물자집산의 문호로 크게 발달되기도 하였다.
현재는 1·6일의 은산장, 2·7일의 홍산장, 3·8일의 규암장, 4·9일의 구룡장, 5·10일의 부여장 및 마전장 · 양화장 · 임천장 등이 있다. 서부산지에 있던 외산장은 대천 상권으로 흡수되었고, 장암장 · 세도장 · 석성장은 1973년에 폐시되었다.
한때 군내 최대 장시였던 홍산장은 부여군 · 서천군 · 보령시 등 3개 시 · 군의 대표적인 쇠장[牛市場]으로 그 기능이 바뀌었다. 한편 부여장에서는 곡물, 채소, 기타 식료품 및 의료품과 생활필수품이 주로 거래되고 있으며, 상권은 군내 일원 및 공주시와 청양군 일부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1970년대부터는 시내버스 교통망이 형성되면서 면단위 장시를 흡수하였다. 특히, 관광도시적 기능이 활발해짐에 따라 가로변에 관광기념품을 제조, 판매하는 상설상가가 형성되어 활기를 띠고 있다.
도로는 공주시 탄천면으로 통하는 40번 국도, 서천군 판교면으로 통하는 4번 국도, 청양군 남양면과 서천군 한산면으로 통하는 29번 국도 등이 부여읍과 이에 인접한 규암면 일대에서 교차하고 있고, 여러 지방도와 기타 도로들이 이들 국도에 연결되고 있어서 교통이 편리하다.
부여읍과 규암면 사이에 가설된 백제대교는 서천군 · 보령시 등 서해안 방면과 공주시 · 논산시 등지를 연결해주고 있다. 이 다리에 최근 교통량이 급증함에 따라 바로 옆에 또 다른 다리인 백제교(4차선 830m)가 건설되어 교통량을 분산시키고 있다. 인접한 논산시에 호남선의 논산역과 호남고속도로의 논산 인터체인지가 있어서 교통이 편리하다.
현재 백제문화권 특정지역개발계획에 의해 공주와 부여 간의 금강변을 따라 건설된 백제큰길(22.5㎞), 청양 · 규암 방면에서 백제역사재현단지에 진입하는 도로(3.5㎞), 공주 · 부여 방면에서 백제역사재현단지에 진입하는 도로(2.7㎞)와 사비교(765m)가 건설되어 공주 · 청양 방면의 교통은 더욱 편리해졌다.
이 밖에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웅포면과 양화면 내성리를 연결하는 웅포대교(1,226m)와 접속도로(542m)가 건설되어 있어서, 전북특별자치도 지역과의 접근도 크게 좋아졌다.
이 군은 538년에 백제가 도읍을 옮겨온 이래 122년간 찬연한 문화의 꽃을 피웠던 곳으로 많은 유물 · 유적과 경승지가 산재해 있어 고적답사 및 관광을 위해 많은 내외국인이 찾고 있다.
백제탑의 저녁노을, 수북정에서 바라보는 봄날 백마강가 아지랑이, 고란사의 은은한 풍경소리, 노을진 부소산에 간간이 내리는 부슬비, 낙화암에서 애달프게 우는 소쩍새, 백마강에 고요히 잠긴 달빛, 구룡평야에 내려앉은 기러기떼, 규암나루에 들어오는 돛단배 등을 지칭하는 부여8경은 최근까지 부여를 찾는 관광객들이 즐기던 여덟 가지 풍경이다.
백마강 · 부소산 · 낙화암 등은 사철 다른 모습으로 대할 수 있어서 이 지방을 우리나라의 대표적 관광명소로 만들고 있다. 연중 일반관광객과 수학여행단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일본인 탐방객들도 자주 다녀가고 있다.
관광은 대체로 3개 코스로 이루어진다. 첫째는 부소산 코스로 삼충사 · 영일루 · 군창지 및 궁녀사당 · 송월대 · 사비루 · 백화정 · 낙화암 · 고란사 · 부소산 입구이다. 둘째는 부여읍 관광 코스로 박물관 · 부소산성 · 구드레 · 청산성 · 쌍북리 도요지 · 정림사지 · 나성 · 궁남지 · 망해정 · 부여향교 · 능산리 고분군 · 청마산성이다. 셋째는 백마강 코스로 부소산성 · 조각공원 · 구드레나루 · 규암나루이다.
1996년부터 시작된 백제문화권 특정지역개발계획에 의해 규암면 합정리 일대 120만 평의 부지에 역사재현촌, 연구교육촌 등으로 구성된 백제역사재현단지 등이 들어서고 있고, 백제큰길 · 사비교 · 백제교 · 웅포대교 등이 건설되고 있다. 또, 궁남지를 중심으로 인근 군수리 사지와 화지산을 연계 개발하여 8만 평 규모의 종합관광 레저타운의 건립을 추진하고 있어서, 관광개발에 활기를 띠고 있다.
특히, 짝수년에는 부여에서 열리고, 홀수년에는 공주에서 열리는 백제문화제는 국내 3대 문화제의 하나로서 1996년에 제42회 백제문화제가 부여에서 열렸다. 이 문화제에는 백제천도(遷都) 행사 등 36개 종목의 행사가 4일여에 걸쳐 화려하게 펼쳐져서 많은 국내외 관광객이 운집했다.
한편, 1996년에는 백제역사재현단지 내의 역사교육촌에 문화체육부산하(현 문화관광부)의 한국전통문화학교를 건립하기로 결정되어 부여는 백제문화역사관광 외에 전통문화의 교육도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군의 북동부에 위치한 읍. 면적 58.86㎢, 인구 2만 3740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동남리이다. 538년부터 멸망할 때까지 왕도(王都, 泗沘城)였으며,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는 부여현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현내면(縣內面)이라 하였다. 1917년 부여면으로 개칭했고, 1960년 읍으로 승격하였다.
읍의 동부는 낮은 구릉지대로 평지가 섞여 있고 금강 유역에는 비교적 넓은 충적지가 발달되어 있다. 백마강은 읍을 곡류하여 시가지 북쪽의 부소산을 침식, 백제 패망의 애환이 서린 낙화암의 경승을 이루는 한편, 왕도의 방어선 구실을 하였다.
22.46㎢의 농경지에서 쌀 · 보리 · 인삼 · 채소 재배가 활발하다. 식품 · 섬유류 등의 소규모 제조업도 이루어지고, 인삼을 가공하는 홍삼제조공장과 관광기념품을 제작, 판매하는 상점이 많다. 공주, 논산, 서천, 보령 등지로 통하는 도로가 개설되어 있어서 교통이 원활하며, 지역 발전에 활기를 주고 있다.
문화유적은 동남리에 망해정 · 금성산 석불좌상 · 부여향교 · 정림사지 · 정림사지 석불좌상 · 정림사지 오층석탑 · 백제와요지 · 궁남지 · 의열사 · 의열사비, 관북리에 당 유인원 기공비 · 보광사 중창비 · 부여 석조 · 부여 동헌, 쌍북리에 군창지 · 백화정 · 낙화암 · 고란사 · 영일루 · 팔각정 · 삼충사 · 사비루 · 부소산성 · 청산성 · 요지, 군수리에 정세채 가옥 · 사지, 염창리에 부여 나성, 능산리에 고분군 · 청마산성, 중정리에 백제건물지 · 민칠식 가옥, 현북리에 임강사지, 저석리에 창강서원 등이 있다.
동남리(東南里) · 구아리(舊衙里) · 관북리(官北里) · 쌍북리(雙北里) · 구교리(舊校里) · 군수리(軍守里) · 가탑리(佳塔里) · 왕포리(旺浦里) · 중정리(中井里) · 염창리(鹽倉里) · 현북리(縣北里) · 능산리(陵山里) · 석목리(石木里) · 용정리(龍井里) · 가증리(佳增里) · 정동리(井洞里) · 백왕리(白旺里) · 송곡리(松谷里) · 상금리(上錦里) · 송간리(松間里) · 저석리(楮石里) · 신정리(新正里) 등 22개 리가 있다.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21.86㎢, 인구 2,626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태양리이다. 1908년 홍산군 해안면(海岸面)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동면의 부두 등 8개 리를 병합해 구룡들의 이름을 따서 구룡면이 되었다.
북쪽은 망진산(望辰山) 등의 산지로 되어 있으며, 남쪽은 구룡천과 금천이 합류, 충적범람원이 발달되어서 구룡평야를 이루고 있다. 해안면이라는 옛 지명이 말해주듯이 이 지역은 바다가 메워져 형성된 지형으로 전해 온다.
예전에는 여름철에 150㎜ 이상의 집중강우 때 금천의 범람으로 침수피해를 많이 받았으나 금강에 제방을 구축한 뒤에는 이러한 피해가 없어지고 지력도가 높은 옥토가 되었다.
산업은 경지율 51.3%로 쌀의 생산이 많으며, 논의 휴한기를 이용한 토마토 · 상추 등의 원예농업도 발달하였다. 최근 가내수공업으로 모시짜기가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도로는 서해안 장항과 웅천 방면, 동쪽으로 부여∼대전 간을 연결하는 도로 외에 은산 · 청양 지구로 통하는 여러 노선이 X자형으로 얽혀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태양리에 백제석실고분, 구봉리와 논치리에 백제시대의 산성이 있으며, 금사리에 남방식(기반식) 고인돌과 창렬사가 있다.
태양리(太陽里) · 주정리(舟亭里) · 구봉리(九鳳里) · 죽절리(竹節里) · 논치리(論峙里) · 금사리(金寺里) · 현암리(玄巖里) · 용당리(龍塘里) · 죽교리(竹橋里) · 동방리(東芳里) 등 10개 리가 있다.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46.53㎢, 인구 1만 38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규암리이다. 본래 부여군 지역으로 금암리에 있는 여울의 이름을 따서 천을면이라 하여 함양(咸陽) · 검복(檢卜) · 돌리(乭里) 등 15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천을면(淺乙面) · 도성면(都城面) · 송당면(松堂面)을 병합해 규암의 이름을 따서 규암면이 되었다.
지형은 북쪽으로 금강천이 청양군 청남면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금암리의 오천산(五泉山)에서 수목리에 이르기까지 100m 내외의 구릉성 산지로 이어져 있다. 동쪽으로 금강의 대곡류와 금천이 합류되는 곳에 넓은 충적범람원인 구룡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산업은 43.1%의 경지율과 비옥한 토양으로 쌀의 생산이 많으며, 외리를 중심으로 논의 휴한기를 이용해 과일과 채소류 등을 많이 생산한다. 특히, 수박은 국내 최대 산지의 하나가 되고 있다. 나복리를 중심으로 한 잎담배와 합송리를 중심으로 한 인삼 재배가 활발하다. 축산은 합송리 · 금암리 · 신성리에서 젖소, 진변리 · 반산리 등에서 돼지를 사육한다. 그 밖에 인삼 제조업도 발달해 있다.
도로는 부여∼청양 간 지방도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통과하며, 서남부 지역과 부여읍과의 교통은 과거에 규암나루만 있어서 불편했으나, 1970년대에 백제대교가 건설되면서 편리해 졌다.
문화유적은 규암리에 수북정, 진변리에 부산서원, 신성리에 증산성, 호암리에 호암사지 · 천정대, 금암리에 오층석탑 등이 있고, 나복리에서는 선사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진변리에는 부여동매 1그루가 있다.
규암리(窺巖里) · 외리(外里) · 내리(內里) · 반산리(盤山里) · 합송리(合松里) · 노화리(盧花里) · 부여두리(扶餘頭里) · 수목리(秀木里) · 석우리(石隅里) · 나복리(羅福里) · 모리(茅里) · 함양리(咸陽里) · 신성리(新城里) · 금암리(金巖里) · 호암리(虎巖里) · 합정리(合井里) · 신리(新里) · 오수리(午水里) · 진변리(津邊里) 등 19개 리가 있다.
군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20.99㎢, 인구 2,10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회동리이다. 본래 홍산군(鴻山郡)의 남쪽이 되므로 남면이라 하여 마동(馬東) · 마서(馬西) · 호암(虎巖) · 송곡(松谷) 등 14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부여군에 편입되었다. 1917년 홍산군 상동면 일부 지역인 삼천 등 5개 리를 병합하였다.
남부는 장암면 · 충화면 · 옥산면과의 자연적 경계를 이루는 구릉지형이며, 북부는 금천 유역의 충적범람원인 남평평야이다. 산업은 삼룡리 · 송암리 · 마정리 · 회동리 · 내곡리의 평야지대에서 쌀이 생산된다.
신흥리 일대에서는 논의 휴한기를 이용해 딸기와 토마토 등을 생산하여, 대전 등지로 출하하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잎담배도 재배되고 있다.
축산은 송암리 · 회동리 · 마정리에서 돼지의 집단사육이 크게 이루어지고 있다. 도로는 서쪽으로 통하는 횡단도로가 남북으로 분기되어 있으나 간선도로에서 떨어져 있으므로 교통이 불편하다.
문화유적은 삼룡리에 효자정려문, 내곡리에 향토문화유산인 동절사 등이 있다. 회동리(檜洞里) · 삼룡리(三龍里) · 송학리(松鶴里) · 마정리(馬井里) · 송암리(松巖里) · 내곡리(內谷里) · 신홍리(新鴻里) · 대선리(大船里) · 금천리(金川里) 등 9개 리가 있다.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40.45㎢, 인구 1,759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운치리이다. 본래 홍산군 지역으로 성주산(聖住山) · 아미산 · 월명산의 안쪽에 있다하여 산내면(山內面)이라 하였다.
1895년 월하산(月下山)의 바깥지역을 외산내면, 안쪽을 내산내면이라 하여 서운(棲雲) · 금지(金池) 등 19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야면과 해안면의 일부를 병합해 지금의 이름으로 부여군에 편입되었다.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의 지치리에서 원형을 그리면서 구룡천이 흐르고 있어 산태극 · 수태극의 지형을 이룬다. 산간지역이라 경지율은 19%로 낮으며, 주곡농업 외에 밭농사를 주로 하여 군내에서 쌀보리를 가장 많이 생산한다.
논의 휴한기를 이용한 딸기 재배가 활발하고, 지치리 등지에서 고추도 많이 생산된다. 축산은 소 · 돼지 사육이, 양잠은 금지리를 중심으로 누에고치 생산이 활발하다.
도로는 대천∼부여 간 국도가 면의 중앙을 동서로 통과하고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주암리에 은행나무가 있다. 운치리(雲峙里) · 천보리(天寶里) · 묘원리(妙院里) · 율암리(栗巖里) · 주암리(珠巖里) · 저동리(苧洞里) · 마전리(馬田里) · 온해리(溫蟹里) · 지치리(芝峙里) · 금지리(金池里) 등 10개 리가 있다.
군의 남동단에 위치한 면. 면적 30.58㎢, 인구 3,36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증산리이다. 본래 석성현의 읍내가 되므로 현내면이라 하여 향교(鄕校) · 남산(南山) · 포사(浦沙) 등 8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석성천을 경계로 동부 5개 면을 논산군에 이관하고 서부 4개 면을 부여군에 편입하면서 석성현의 이름을 따서 석성면이 되었다. 197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현북리가 부여읍에 편입되었다.
지형은 서쪽으로 금강에 연해 있고, 동쪽의 봉황산 · 등골산 등의 구릉성 산지를 제외하고는 석성천과 그 지류 유역에 접하여 충적범람원이 발달되어 있다. 예로부터 금강의 수운을 이용해 곡물을 강경 · 군산 등지로 출하하는 등 수상교통이 발달했으나 육상교통의 발달로 그 기능을 잃게 되었다.
주요 농산물은 쌀과 보리이며, 봉정리를 중심으로 무 · 배추 · 토마토 · 딸기 등의 채소와 과일이 생산된다. 현내리를 중심으로 잎담배 재배도 활발하다. 봉정리에서는 누에고치가 많이 생산되며, 양송이 생산량은 도내 제일이다. 도로는 논산∼부여 간의 국도와 공주∼강경 간의 지방도가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현내리에 사비성을 지키기 위해 포곡식(包谷式) 석축산성으로 축성한 석성산성을 비롯해 인강사지(印江寺址) · 부도가 있으며, 석성동헌과 석성향교가 있다. 증산리(甑山里) · 석성리(石城里) · 봉정리(鳳亭里) · 비당리(碑堂里) · 정각리(正覺里) · 현내리(縣內里) 등 6개 리가 있다.
군의 남동단에 위치한 면. 면적 41.92㎢, 인구 3,701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청송리이다. 본래 임천군 초신면(草新面)으로 인세면(仁世面)이라 하여 청포(菁浦) · 계양(桂陽) · 귀덕(歸德) 등 8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성백면(城白面)과 석성군 현내면의 일부 지역을 병합해 지금의 이름으로 부여군에 편입되었고, 1973년에 장암면 사산리를 병합하였다.
동쪽은 금강이 곡류하는 사행천의 보호사면을 이루고 있어 하천부지 면적이 군내에서 가장 넓다. 이 곡류부 형성 이전에 관통유로(貫通流路)였을 것으로 보이는 반조원리 · 청송리 · 청포리 일대와 서부 사동천(寺洞川) 유역은 넓은 충적범람원이 발달해 있다.
이들 범람원 사이에는 대홍산 · 군관산 · 토성산 등을 주봉으로 하는 저구릉지대가 있다. 청포리는 겨울철 오리의 서식처이다.
산업은 40.8%의 경지율로 쌀의 생산이 많고, 청포리 · 가회리를 중심으로 채소도 많이 생산되며, 양봉도 활발하다. 도로는 세도 · 임천 · 한산을 연결하는 동서횡단 노선과 이와 교차되어 장암면 하황리를 지나 부여로 연결되는 남북관통 노선이 있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동사리에 동곡서원 등이 있다. 청송리(靑松里) · 반조원리(頒詔院里) · 사산리(沙山里) · 화수리(花樹里) · 수고리(水古里) · 동사리(東寺里) · 간대리(艮大里) · 청포리(菁浦里) · 귀덕리(歸德里) · 장산리(長山里) · 가회리(佳檜里) 등 11개 리가 있다.
군의 최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32.78㎢, 인구 1,91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입포리이다. 본래 임천군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적량면(積良面) · 홍화면(洪化面) 등 6개 면과 지서면(紙西面)의 탑리 · 초일리의 일부와 한산군(韓山郡) 동상면(東上面)의 일부 지역을 병합해 적량과 홍화의 이름을 따서 양화면이 되었다.
동쪽으로 금강 본류가 흐르고 서쪽으로 여사천(餘士川)이 합류하여 일대에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으며, 망배산(望拜山) · 산악산(山岳山) · 시루산 등 100m 내외의 낮은 구릉지형으로 이어져 있다.
주요 산업은 주곡농업으로 쌀을 주로 생산한다. 오량리에서 생산되는 생강은 대도시로 출하되고, 특용작물로 잎담배가 재배된다.
도로는 부여∼장항 간 국도가 면의 중앙을 북서로 통과하고 있으나 교통이 불편하다. 문화유적은 초왕리에 묘정비가 있다.
입포리(笠浦里) · 초왕리(草旺里) · 오량리(五良里) · 족교리(足橋里) · 송정리(松亭里) · 벽룡리(碧龍里) · 내성리(內城里) · 원당리(元堂里) · 암수리(巖樹里) 등 12개 리가 있다.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25.37㎢, 인구 1,51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안서리이다. 본래 홍산군 지역으로 홍산읍 내 서쪽 아래에 있으므로 하서면이라 하여 가덕(加德) · 차대(車垈) · 내동(內洞) 등 12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서면의 증암 · 석우 등 17개 리와 남면의 일부를 병합해 옥녀봉의 이름을 따서 옥산면이라 하고 부여군에 편입되었다.
지형은 동서 방향으로 금천구조선이 대덕리 서쪽 부시치에서 끝나고, 다시 이와 직각을 이루는 또 하나의 구조선이 옥산저수지와 북쪽의 상기리를 이어 T자 모형의 곡을 이루고 있다. 서쪽의 옥녀봉(玉女峰), 동쪽의 비홍산(飛鴻山), 남쪽의 원진산(遠進山) 등의 산지에 둘러싸여 분지를 형성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이지만 경지가 협소하여 영세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무 · 배추 · 고추 · 딸기 · 참깨 등 원예작물을 경작하여 토지 이용도를 높여가고 있다.
상기리 · 가덕리를 중심으로 인삼 재배가 성하며, 상기리 · 홍연리 등 4개 리가 복합영농시범지역으로 선정되어 유축농업으로의 전환단계에 있다.
도로는 부여∼장항 간을 연결하는 노선과 남북 간 노선이 있으나 교통이 불편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상기리에 가교비가 있다. 안서리(安西里) · 상기리(上基里) · 학산리(鶴山里) · 홍연리(鴻淵里) · 봉산리(鳳山里) · 중양리(中陽里) · 대덕리(大德里) · 신안리(新安里) · 내대리(內垈里) · 가덕리(加德里) · 수암리(秀巖里) 등 11개 리가 있다.
군의 서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56.03㎢, 인구 2,65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만수리이다. 본래 홍산군 지역으로 성주산 · 아미산 · 월명산 안쪽에 있다 하여 산내면이라 하였다.
1895년 월하산 바깥지역을 외산내면이라 하여 하신(下新) · 상신(上新) · 동구(洞口) 등 25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내산면 일부 지역을 병합해 지금의 이름으로 부여군에 편입되었다.
차령산맥의 주맥을 이루는 지역으로 산지에 둘러싸인 지형이며, 그 사이를 웅천 상류가 흐르고 있다. 주요 산업은 농업이지만 경지율이 15.7%로 군내에서 가장 낮다. 축산으로는 군내 유일의 소 방목지인 외산목장이 있다.
제조업으로 장항리에 갈포를 원료로 하는 벽지공장이 있다. 만수리 · 장항리 · 수신리 · 지선리 등 남포층 지질에서는 무연탄이 생산되어 서해화력발전소가 있는 비인 등지로 공급된다.
도로는 대천∼부여 간 포장도로가 남부를 지나고 있으며, 여기서 협곡을 따라 청양으로 가는 지방도가 갈라져 있으나 교통은 불편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만수리에 무량사 극락전 · 석등 · 오층석탑 · 당간지주 및 김시습 부도, 화성리에 화성리 오층석탑 등이 있다. 수리바위를 중심으로 한 만수리 일대의 협곡지형은 단풍철에 특히 아름답다.
만수리(萬壽里) · 복덕리(福德里) · 장항리(獐項里) · 화성리(花城里) · 전장리(前場里) · 삼산리(三山里) · 비암리(飛巖里) · 지선리(芝仙里) · 가덕리(佳德里) · 갈산리(葛山里) 등 13개 리가 있다.
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69.45㎢, 인구 4,18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신대리이다. 본래 방생면(方生面)으로 부여현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당시 공동면(公洞面)의 12개 리, 가좌면(加佐面)의 14개 리, 도성면(道城面), 홍산군 해안면 일부를 병합해 은산봉(恩山峰)의 이름을 따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지형은 산지가 많으나 하천 유역에는 크고 작은 평야가 발달해 있다. 경지율은 22.3%로 낮은 편이지만 주곡농업을 주로 하여 보리 생산은 군내 1위이다.
최근 회곡리 · 오번리 · 내지리 등을 중심으로 완두콩 · 옥수수 등을 재배해 4, 5월에 서울 · 대전 등지로 출하하는 상품작물이 늘고 있다. 또한 양봉은 군내 2위이며 잎담배와 밤 · 도토리 · 상수리 · 호두 등의 생산도 많다. 산록지형이 많아 수요지와의 교통편에 따라 초지 조성의 기대도 크다.
도로는 청양군 목면을 지나 구룡면으로 이어지는 노선과 이와 교차되어 규암∼청양 간을 연결하는 노선이 있으나, 산지지형이고 간선도로에서 떨어져 있어 교통은 불편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각대리에 숭각사지가 있고 금공리 · 가곡리 · 신대리에는 고인돌이 산재해 있다. 또 가중리에는 미륵불과 정인지(鄭麟趾)의 수양지로 이름 있는 도천사지 등이 있고, 은산리의 은산별신제는 유명하다.
은산리(恩山里) · 신대리(新大里) · 회곡리(檜谷里) · 금공리(琴公里) · 가곡리(佳谷里) · 용두리(龍頭里) · 거전리(巨田里) · 장벌리(長閥里) · 나령리(羅領里) · 대양리(大陽里) · 오번리(五番里) · 홍산리(洪山里) · 가중리(佳中里) · 경둔리(敬屯里) · 내지리(內地里) · 합수리(合首里) · 각대리(角垈里) 등 17개 리가 있다.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43.12㎢, 인구 3,19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군사리이다. 본래 임천군 소재지로 읍내면(邑內面)이라 하여 군사(郡司) · 석사(石沙) · 관음(觀音) · 옥북(玉北) 등 17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면의 15개 리와 성백면 일부 지역을 병합, 임천군의 이름을 따서 부여군에 편입하였다.
지형은 주머니꼴로 북쪽으로 돌출한 평면형이며, 북의 금성산(錦城山, 215m), 남서쪽의 무제산(武帝山) 등 잔구성 산지도 있으나 대부분 저평한 준평원을 이루고 있다. 이들 사이를 남류하여 금강 본류와 합하는 여러 지류의 하천 유역에 넓은 충적범람원이 발달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이며 칠산리에서는 논의 휴한기를 이용해 오이 등의 채소류를 생산, 서울 등지로 출하한다. 과수는 만사리의 사과와 배, 축산은 두곡리의 젖소 사육과 칠산리의 양돈이 있다. 이곳 특산물인 갈포는 명맥만 유지하는 정도이며, 모시짜기는 점차 활기를 찾아가고 있다.
도로는 부여에서 군사리를 거쳐 세도면 청포리로 가는 노선이 강경∼서천 간 지방도와 연결된다. 또한, 탑산리에서 충화면과 문산면을 거쳐 서천에 이르는 노선도 있다. 문화유적은 구교리에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 대조사 석탑, 칠산리에 칠산서원, 군사리에 백제의 요충지였던 가림성과 임천향교, 만사리에 퇴수서원 등이 있다.
군사리(郡司里) · 구교리(舊校里) · 두곡리(豆谷里) · 칠산리(七山里) · 비정리(飛亭里) · 탑산리(塔山里) · 가신리(加神里) · 옥곡리(玉谷里) · 발산리(鉢算里) · 만사리(萬社里) · 점리(店里) 등 11개 리가 있다.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47.70㎢, 인구 3,046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석동리이다. 본래 임천군 지역으로 임천군 읍내 북쪽에 있다 하여 북변면(北邊面)이라 하고 합복(閤卜) · 원문(元門) · 산동(山東) 등 4개 리를 관할하였다.
1895년에 박곡면(朴谷面) 등의 6개 리를 병합해 북박면(北朴面)으로 개칭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당시 남내면(南內面)과 성백면, 석성군 현내면, 홍산군 남면 및 천을면의 일부 지역을 병합해 장암의 이름을 따서 부여군에 편입하였다.
북쪽은 금천, 동쪽은 금강 줄기가 감싸고 있으며, 구룡평야의 일부인 합곡리 · 원문리 · 석동리 일대에는 충적범람원이 발달해 있다. 금강 곡류 보호사면에 해당하는 정암리 · 장하리 · 하황리 일대는 집중강우 때 침수 피해가 잦은 지역으로, 하천부지 면적이 군내에서 두 번째로 넓다.
주요 농산물은 금천 유역인 석동리 · 합곡리와 사동천 유역인 지토리에서 쌀의 생산이 많으며, 장하리를 중심으로 재배된 무 · 배추는 전국으로 출하되고 있다.
논의 휴한기를 이용한 참외 · 딸기 · 오이 · 토마토 · 고추 등의 재배도 활발하여 농가소득에 기여한다. 합곡리의 주민이 협동으로 누에고치를 생산하며, 유축농업으로 합곡리의 돼지 사육이 있다.
도로는 석동리를 중심으로 부여∼서천 간 노선이 강경으로 연결되며, 또한 북촌리로 가는 길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장하리에 흥학당 · 부여 장하리 삼층석탑, 점상리에 조신의 묘, 상황리 고분 4기 등이 있다. 정암리 · 북고리 · 합곡리 등에는 파손된 토성이 있는데 이 중 합곡리 천마성은 유명하다.
석동리(石東里) · 원문리(元門里) · 합곡리(閤谷里) · 점상리(店上里) · 지토리(紙土里) · 하황리(下黃里) · 상황리(上黃里) · 장하리(長蝦里) · 북고리(北皐里) · 정암리(亭巖里) 등 10개 리가 있다.
군의 남서단에 위치한 면. 면적 37.08㎢, 인구 1,241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천당리이다. 본래 임천군에 속해 있었으나 백제 때 성충 · 계백 등 8명의 충신들이 출생한 곳이라 하여 팔충면(八忠面)이라 하고 지석(支石) · 당동(堂洞) 등 5개 리를 관할하였다.
1895년 가화면(可化面)을 합하여 팔가면(八可面)이라 개칭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당시 북박면 등 4개 면의 일부 지역을 병합해 팔충과 가화의 이름을 따서 부여군에 편입하였다.
저산성지대 외에 대부분 구릉지형으로 무쇠점소류지 부근을 분수령으로 북의 금천수계와 남의 금강본류수계로 나뉜다. 경지율은 23%로 낮은 편이나 주곡농업을 주로 한다. 채소도 재배하지만 집약화의 정도는 낮은 편이다.
양잠은 군내 최고이며, 약초와 잎담배 재배도 활발하다. 축산은 천당리 · 팔충리 · 만지리 등지에서 소 · 젖소 · 돼지를 많이 사육하고 있으며, 특히 산양 사육은 군내 제일이다.
도로는 서쪽의 옥산면에서 동쪽의 임천면 군사리로 연결되어, 천당리에서 남쪽의 양화면 입포리로 갈라지는 노선이 있는데, 이 동서 노선에서 북쪽으로는 남면 회동리, 남쪽으로는 오덕리 · 가화리로 통하는 노선이 갈라진다.
문화유적은 오덕리에 선조대왕 및 평해공주의 태실비가 있다. 천당리(天堂里) · 지석리(支石里) · 팔충리(八忠里) · 복금리(福金里) · 만지리(晩智里) · 현미리(玄眉里) · 가화리(可化里) · 청남리(靑南里) · 오덕리(五德里) 등 9개 리가 있다.
군의 최동단에 위치한 면. 면적 27.95㎢, 인구 2,48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응평리이다. 본래 부여군 지역으로 새울 또는 초촌을 따서 초촌면이라 하여 상련(上蓮) · 하련(下蓮) 등 18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몽도면(蒙道面) 보각리와 노성면(魯城面) · 소성면(素城面)의 17개 리, 장결면(長缺面) · 석성면 · 증산면(甑山面)과, 공주군 곡화천면(曲火川面)의 신흥리 등 일부 지역을 병합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형은 북부의 망월산(望月山) · 감투봉 등의 산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평야지대이며, 특히 석성천 지류인 연화천과 마름내 유역에 넓은 충적범람원이 발달해 있다. 여름철 침수 피해가 잦은 지역이었으나, 초평리∼응평리, 소사리∼진호리 간의 제방공사가 완공되어 곡창지대로 바뀌었다.
경지는 군내에서 가장 넓으며, 주곡농업에 의존하고 있다. 범람원지역인 응평리 · 송정리 · 진호리 · 신암리 등지에는 쌀의 생산이 많고, 간선도로변인 연화리 등지에는 딸기 · 오이 · 토마토 등 원예농업이 발달되어 있다.
군내 생산량 2위인 양송이 재배는 연화리 · 초평리가 중심지이고, 잎담배는 신암리, 인삼은 송국리, 복숭아 · 사과 · 배 등의 과수는 진호리가 중심지이다.
한편, 축산은 소사리와 세탑리의 젖소, 송국리와 진호리의 한우, 응평리와 송정리의 돼지 사육이 유명하며, 돼지의 경우 200두 이상의 대규모 사육농가도 있다.
임업으로는 진호리의 외약목 재배를 들 수 있다. 도로는 공주 · 탄천 · 석성 · 강경 간 노선이 북동에서 남서로 나 있으나 교통은 불편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송국리에서 다량의 청동유물이 출토되었고, 인근 20여 곳에 선사시대의 주거지가 분포되었으며 세탑리의 부여 세탑리 오층석탑, 산직리의 지석묘 등이 있다.
응평리(鷹坪里) · 연화리(蓮花里) · 추양리(楸陽里) · 초평리(草坪里) · 송국리(松菊里) · 세탑리(細塔里) · 신암리(莘巖里) · 송정리(松丁里) · 진호리(眞湖里) · 소사리(素沙里) · 산직리(山直里) 등 11개 리가 있다.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23.90㎢, 인구 3,230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북촌리이다. 본래 홍산군청이 있는 곳이므로 현내면이라 하여 북촌(北村) · 좌촌(坐村) 등 14개 리를 관할하다가 1895년 군내면(郡內面)으로 개칭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야면(大也面) · 상서면(上西面) · 상동면(上東面)의 일부 지역을 병합해 홍산군의 이름을 따서 부여군에 편입하였다.
아홉사리고개에서 비홍산까지의 서부는 산지, 태봉산 동부는 구릉지대, 그리고 남부의 복촌리 · 좌홍리 등 금천 유역은 범람원지대를 이룬다. 주요 산업은 주곡농업이지만 논의 휴한기를 이용한 딸기 · 토마토 · 오이 등 원예작물도 활발하여 서울 등지로 출하된다.
좌홍리를 중심으로 인삼 재배도 활발하며, 토정리를 중심으로 젖소가 사육된다. 제조업으로는 남촌리 등에 섬유업체가 있다. 도로는 서해안의 장항과 동쪽으로 부여∼대전 간을 연결하는 간선도로가 있고, 남쪽으로 장암과 서천군 문산면으로 가는 노선이 있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남촌리에 홍산동헌, 북촌리에 홍산 만덕교비 · 홍산객사 · 홍산 형방청, 홍량리에 부여 홍량리 오층석탑, 교원리에 홍산향교 · 청일사 · 홍산대첩비 등이 있다. 특히, 홍산 보부상 유품은 국가민속문화유산로서 6세기의 전통을 지닌 순수 민간단체 유품이다.
북촌리(北村里) · 남촌리(南村里) · 홍량리(鴻良里) · 좌홍리(坐鴻里) · 교원리(校院里) · 토정리(土亭里) · 조현리(鳥峴里) 등 10개 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