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집권기 정권에 반발하여 승려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지방에서는 농민이나 천민의 반란에 편승하여 승려들이 봉기하는 경우가 있었다.
1202년에는 경주의 이비(利備)와 패좌(孛佐)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 운문(雲門 :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울진(蔚珍)·초전(草田 :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 등지의 반란세력과 연결하여 각 주군(州郡)을 휩쓸면서 기세를 떨쳤으며, 당시 무신 집정 최충헌(崔忠獻)은 3군(軍)으로 편성한 관군을 보내어 이들을 토벌하고 있었다.
이렇게 경상도일대가 소란하자 1203년 부인사의 승려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이에 경주적(慶州賊) 이비와 패좌의 토벌에 동원되었던 좌도사(左道使) 최광의(崔匡義)가 이 사실을 정부에 보고하고 정부에서는 이 승려들을 붙잡아 섬으로 귀양보냄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러한 지방사원의 동요는 무신정권에 대한 불만에 있었다고 하겠는데, 때를 같이하여 영주의 부석사(浮石寺)와 청송의 쌍암사(雙巖寺)에서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