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청군 ()

대동여지도 중 함경남도 북청 부분
대동여지도 중 함경남도 북청 부분
인문지리
지명
함경남도의 동남부에 위치한 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함경남도의 동남부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이원군·단천군, 서쪽은 신흥군·홍원군, 남쪽은 동해, 북쪽은 풍산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7°52′∼128°35′, 북위 40°0′∼40°37′에 위치하며, 면적 2,375.5㎢, 인구 20만 9530명(1944년 현재)이다. 3개 읍 11개 면 123개 이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북청읍 내리이다.

자연환경

지세는 백두산봉에서 뻗은 장백산맥이 배경이 되어 함경산맥과 함께 이중 병풍형을 이루어놓은 정남향에 위치하여서 동쪽·서쪽·북쪽 3면이 산악 지대를 형성하였고, 그 여맥이 남쪽으로 점차 느린 경사를 이루었으며, 산간과 산간 사이에 크고 작은 평야 분지들이 전개되어 있다.

즉, 동쪽은 함경산맥의 지맥이 뻗어 내려 대덕산(大德山, 1,442m)·영덕산(嶺德山, 1,408m) 등이 솟아 이원군과 접하고 있으며, 남동쪽에는 연대봉(蓮臺峯, 133m)이 있다.

서남쪽은 희사봉에서 갈라지는 여맥 중에 발의봉(發義峰, 1,477m)·거두봉(擧頭峰, 1,304m) 등이 솟아 홍원·신흥의 두 군과 경계를 이루고, 북쪽은 함경산맥의 본줄기가 동서로 뻗어 검덕산(劍德山, 1,684m)·후치령(厚峙嶺, 1,335m)·희사봉(希沙峰, 2,117m) 등이 솟아 있다.

이들 세 방면의 높은 산악 지대에서 발원하는 길이가 다른 여러 하천의 물을 모아 남대천이 군의 중앙부를 남쪽으로 흐르면서 유역에 넓은 충적평야를 이루어 놓았다. 이 평야 지대는 이 군의 주요한 생산지이며 거주지가 된다. 그리고 양화면에는 용연호가 있다.

기후는 연평균 기온 9.8℃, 1월 평균 기온 -5.4℃, 8월 평균 기온 23.8℃이며, 연 강수량은 707㎜이다. 첫얼음은 대개 10월 25일경에 얼고, 다음해 5월 28일경에 녹는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청명한 날씨가 많으며, 일조시간이 길어서 함경남도에서는 기후가 좋은 지대로 손꼽힌다.

역사

[고 대]

구석기 시대 유물·유적은 발견된 바 없으나 신석기 시대의 유물·유적이 강상리에서 발견되고, 청동기 시대의 유물·유적도 중리·토성리·강상리·하세동리에서 발견되고 있으므로 적어도 신석기 시대부터는 이곳에도 사람이 살았음이 확실하다.

이 군은 남옥저에 속하여 있다가 고구려가 강성해짐에 따라 56년(태조왕 4) 고구려에 편입되어 군·현을 설치하였을 것으로 믿어지나 확실한 것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점령한 뒤 그 여세를 몰아 함경남도의 함주군·이원군까지 세력을 미쳤으므로 북청군도 이때 신라의 영토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698년 발해가 건국되면서 평안도·함경도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자, 이 군에 남경남해부(南京南海部:뒤에 함흥 지방으로 옮겼음)를 설치하여 함경 방면을 통치하였다. 당시 남경 부근에서 살던 여진족은 점점 더 남하하여 영흥·안변 부근까지 와서 살며 변경을 노략질하는 일이 많았다.

[고 려]

고려의 건국 직후 골암성(鶻巖城:지금의 안변 지방) 성주 윤선(尹瑄)이 내부해오자 태조는 920년 이곳에 유금필(庾黔弼)을 보내어 여진족을 회유하거나 토벌하는 등 동북부 변경 지방의 개척에 힘을 썼다.

그 결과 안변 지방은 물론 영흥·함주 방면을 고려 영토로 편입하였으며, 발해가 망한 뒤에는 그 유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고려는 천리장성을 쌓아 거란·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였는데, 북청 지방은 장성 밖에 있어서 여진족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1107년(예종 2) 12월 윤관(尹瓘)이 기병 중심의 별무반을 조직, 17만 명의 대군을 동원, 수륙양면작전을 펴서 함흥평야를 점령하고 구성(九城)을 쌓았다. 그러나 2년 뒤에 완안부 여진족의 공격과 화평 제의, 화평파 조신들의 윤관에 대한 시기 등이 작용하여 구성 지역을 여진족에게 반환하게 되었다.

오늘날 구성의 전 위치는 연구자에 따라 이론이 있으나, 그중 길주와 복주는 현재의 길주·단천 땅에 위치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므로 구성의 영역이 함경북도 지역까지 포함되었을 것이므로 이때 북청 지역도 잠시나마 고려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그 뒤 금나라가 몽고에게 패망하면서 다시 영흥·함흥 일대가 고려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1258년(고종 45)에 몽고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설치되어 약 100여 년간 몽고의 지배를 받았다. 북청군은 이때 몽고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이 지방의 명칭을 삼살(三撒)이라 칭하였다.

1356년공민왕의 반원정책으로 화주 일대가 수복되면서 쌍성총관부가 혁파되었고, 더 북진하면서 삼살(북청) 지방이 수복되었다.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복주·길주 등 함경남도의 대부분 지역을 도로 찾았으며, 이 군에 군현을 설치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수복 지역을 다스리기 위하여 이곳에 안북천호방어소(安北千戶防禦所)를 두었고, 1372년(공민왕 21)에 북청으로 개칭되면서 안무사를 두고 만호를 겸하게 하였다.

[조 선]

1398년(태조 7)에 청주부(淸州府)로 개칭되었으며, 1417년(태종 17)에 충청도의 청주목과 발음이 같다고 하여 다시 북청으로 고쳤으며, 1427년(세종 9)에는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이 군 출신 이지란(李之蘭)은 여진인으로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많은 군공을 세우고 조선 건국 뒤 개국공신으로서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1432년 호구 수 1,539호, 인구 4,459명이었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가 길주를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그 여세를 몰아 함경도 일대를 삽시간에 점령하는 등 그 기세가 등등하였다.

그러나 도총관 구성군 준(龜城君浚)이 이끄는 정부군에게 북청에서 크게 패하여 실패하였다. 반란이 평정된 뒤 귀남도에 따로 절도사를 두었고 이곳에는 그 본영을 두었으며, 또 진관을 설치, 단천군과 홍원현·이성현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1592년(선조 25)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은 불과 1개월도 안되어 서울을 점령하고 다시 북상, 함경도를 가토(加藤淸正)가 침공하여 왔다. 따라서 이 군도 왜군에게 점령당하여 막대한 해를 입었다.

이 지역도 함경도의 다른 여러 지역과 같이 의병들이 일어났고, 특히 이지란의 8대손 희당(希唐)이 정문부(鄭文孚)와 함께 크게 의병을 일으켜 분전하다가 전사한 바 있다.

왜군은 의병의 게릴라전과 혹한에 시달린 데다가 평양에서 고니시(小西行長)가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에게 대패하여 한성 방면으로 후퇴함에 따라 다음해 정월 함경도에서 철수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하고 서궁에 유폐하는 것을 반대하였다가 유배된 이항복(李恒福)이 이곳에서 죽었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 때 청군의 일부인 몽고군이 함경도를 거쳐 철수하였기 때문에 또다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1759년(영조 35) 행정구역은 노덕사(老德社)를 비롯하여 19사(社)로 이루어지고 호구 수 6,932호, 인구 3만 8012명에 달하였다.

1851년(철종 2)에 김정희(金正喜)가 헌종묘천사건(憲宗廟遷事件)에 연계되어 이곳에 유배되었다가 다음해에 풀려났는데, 이 기간 동안 이효위(李孝威) 등 여러 사람에게 서체를 전수하였다.

[근 대]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혁 시 북청은 군으로 격하되어서 함흥부에 속하였다가, 이듬해에 13도제가 되면서 함경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죽은 이준(李儁)은 속후면 출신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10일 1차로 천도교가 중심이 되어 기독교도·애국시민·농민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고 그 뒤에도 수차에 걸쳐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다가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그 뒤 신북청면의 이천진(李天鎭)은 6·10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1929년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났을 때 신창면 출신 송계월(宋桂月)은 여류 시인으로서 개벽사(開闢社)의 기자로 근무하면서 항일 투쟁에 참가하였다. 여성의 기수 역할을 하다가 붙잡혀 옥고를 치르던 중 병을 얻어 몇 달만에 죽었다.

8·15광복 직전의 행정 관할구역은 3개 읍 11개 면 이었다.

유물·유적

거산면 하세동리에서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토광묘가 발굴되었고, 이곡면 중리에서는 청동기 시대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신포읍 토성리에는 고구려 시대의 산성이 있으며, 청해토성(靑海土城)은 성벽 서·남·북 등 삼면이 잘 보존된 성으로 둘레 1,298m, 남북 길이 310여m, 동서 길이 330여m인 사각형의 토성이다.

북청읍에는 1517년(중종 12)에 쌓은, 길이 1,800m, 높이 2.8m의 북청읍성이 있으며, 용의동과 덕성면 수서리에도 각각 900m와 2,100m의 산성들이 있다.

이 밖에 이곡면 중리의 별안대산성(別鴈臺山城), 거산면 하입석리의 거산산성(居山山城), 후창면의 가산성(佳山城), 신창읍 토성리의 숙신고도토성(肅愼古都土城), 이곡면 제상리의 성지 등이 있다.

불교 유적으로는 거산면의 벽해암(碧海庵)·보덕암(普德庵)이 있고, 덕성면에는 백운암(白雲庵), 북청읍에 광제사(廣濟寺), 사창서면에 대인사(大仁寺), 신포읍에 연화암·일성암 등의 크고 작은 절이 있다.

1338년에 세워진 성대면 창성리여진문자비(女眞文字碑)는 높이 2.4m, 너비 2.8m, 두께 1.3m의 규모로 북한에서는 유일하게 여진의 소문자로 새겨진 비이다.

이 밖에 거산면 포항리의 시중대(侍中臺)는 윤관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1721년(경종 1) 후손인 헌주가 함경도감사로 있을 때 세운 것이다.

교육·문화

북청 지방 교육은 고려 말에 이미 출발하여 이지란(李之蘭)과 같은 인물이 나올 정도였다. 이직(李稷)이 북청을 두고 지은 시에 “이 고장 풍속은 용감한 무사를 높여 왔는데, 향학에는 유생들이 번성하구나. 먼 변두리 지방의 풍속을 보지 않고서야 교화의 행하여짐을 어찌 알리오.”한 것을 보아도 고려 말에 이미 유생들이 향교 학당에서 흥성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세종 때에 도호부가 설치되면서 향교가 생기고 1627년(인조 5)에 노덕서원(老德書院) 등이 설치되면서 향사와 더불어 유생들이 강학을 받는 면학 기풍이 고조되었다. 한말에는 이준이 세운 경학원(經學院)이 있었으며, 이보다 앞서 많은 서재·서당들이 생겨서 유교 장학을 비롯한 면학이 활발하였다.

서재로는 충익재(忠翊齋) 등 17재가 있었고, 사당으로 삼의사(三義祠) 등 17사가 있어 당시는 물론 뒷날 교육 활동에 큰 기반이 되었다. 서당도 마을 및 가문마다 있었는데, 1937년 서당 139개소에 2,789명의 학동이 있었다고 조사 통계는 전한다.

자녀교육에 대한 열성이 전국에서 가장 높다는 말처럼 개화기에 신학문을 배우려는 열의가 드높아 학교가 많이 설립되었는데, 중학교와 보통학교가 무려 80여 개소를 헤아렸다. 이처럼 한 군의 학교 수가 많은 것도 보기 드문 일이며, 이들 사학은 일제 강점기 말까지 거의가 공립초등학교로 개편되었고 일부 지방에만 사립이 남아 있었다.

공립으로 전환된 뒤의 학교 현황을 보면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북청농업학교(北靑農業學校)와 북청중학교가 있었고, 교육기관으로는 1945년 광복 직전에 14개 읍면에 68개의 초등학교가 있었다.

종교로는 불교가 가장 성하여 광제사 등 23개 사찰이 있었고, 10월 3일에 산상에서 단군성신을 봉사하는 대종교(大倧敎)가 민중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다.

천도교는 1901년부터 포교되어 1904년에는 1만 명의 신도가 있었다. 1920년에는 천도교의 청년회·부인회·승민사·소년회가 결성되었다.

개신교는 1902년 캐나다 선교사 영재영이 포교하면서 시작되어 30여 개의 교회가 건립되었다. 천주교는 독일 신부가 직접 세운 성당이 있었다. 한편, 북청은 김정희의 유배지였기 때문에 유병기(劉秉紀) 등 추사체 서예가가 뛰어났고 미술계에서도 저명인사가 많이 배출된 것이 특색이다.

산업·교통

이 군은 토지가 비옥하고 강수량 및 습도가 적당하여 자연 지리적인 조건이 농업에 알맞고, 임산자원이 풍부하며, 신포 앞바다는 어족이 많아 수산업도 활발하다. 북청읍 일대에는 북청평야가 전개되어 곡창 지대를 이룬다. 총농경지는 230㎢이며, 약 2,700호(1943년 현재)의 농가가 농업에 종사한다.

비교적 관개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농사짓기가 수월하며, 주요 농산물로는 쌀·조·콩·감자·옥수수·피 등이 생산된다.

이 밖에 과일·대마·왕골·채소·약초 등도 상당량 수확되며, 특히 토질이 과수 재배에 알맞아 예로부터 이곡(泥谷)의 배, 통이(通耳)의 구주배, 부동(富洞)의 함종밤, 보주(寶珠)의 사과, 양화(陽化)의 자두, 성대(星垈)의 살구 등 여러 과일의 품질이 우수하기로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북청읍의 소 사육이 유명하며, 상차서·방촌은 우시장으로 알려져 있다. 양돈·누에치기 등은 농촌 부업으로 일반화되어 있다.

동해에 면한 연안 일대는 한류·난류의 교차 지역으로 많은 어족이 모여들어 세계적인 대어장을 이룬다. 따라서 함경남도의 총어획량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명태·대구·청어·정어리·고등어·연어·송어 등이 많이 잡히는데, 특히 신포·마양도 부근은 세계적인 명태 어장이다.

광물로는 철·구리 등이 채굴된다. 공업은 신포·신창 등의 항구에 어유 공장 및 각종 수산물 가공 공장이 세워져 있다. 북청읍에는 아마 공장(亞麻工場)을 비롯하여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주석산 공장(酒石酸工場)이 있다.

상거래는 시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북청·신포·양화·속후·영무장 등이 대표적이다. 북청장은 3·8일에, 신포장은 5·10일에, 양화장은 2·7일에, 속후장은 4·9일에, 영무장은 1·6일에 각각 5일장이 선다.

이들 시장에서는 농산물과 견직물, 각종 생활필수품 등이 거래된다. 군내 유일의 매일 시장은 신창시장인데, 주로 수산물이 거래되며, 이 밖에도 방촌·신북청·만경대시장 등이 있다.

도로는 북청읍에서 사방으로 연결되는데 국도가 동쪽으로 이원·단천 방면으로, 서남쪽으로 신창·신포·함흥방면으로, 북쪽은 남대천을 따라 북행하며, 덕성·성대를 거쳐 후치령을 넘으면 풍산·압록강 방면에 이르게 된다. 각 읍·면의 행정중심지에는 등외도로가 통한다.

철도는 함경선이 해안을 끼고 북상하고 있으며, 육대·신포·양화·강상리·속후·신북청·신창·거산·건자포 등 9개 역이 이 군내에 있다. 지선으로는 신북청∼북청읍의 북청선이 부설되었다.

연안에는 많은 포구가 있으며, 이 중 신포·신창은 기선의 정기 기항지가 되므로 뱃길을 통하여 북청에 들어오는 관문 구실을 한다.

성대면에는 성대금강팔경(星岱金剛八景)과 속후면에 속후팔경(俗厚八景)이 있다. 성대금강팔경은 노인암(老人巖)·구룡암(九龍巖)·통천혈(通天穴)·구룡담(九龍潭)·청계동(淸溪洞)·용출혈(龍出穴)·충천암(冲天巖)·학유정(鶴遊亭) 등의 절경을 일컫는다.

노인암은 의관을 갖추어 입은 노인이 합장하고 서 있는 형상인데, 암석의 높이가 상당히 높다. 구룡암은 아홉 마리의 용이 얽힌 모양으로 높이가 수십 장(丈)이나 된다.

통천혈은 암석 구멍을 통하여 창공을 쳐다볼 수 있는 암석혈(巖石穴)이다. 구룡담은 절벽으로 떨어지는 폭포수가 이루어 놓은 큰 못이다. 청계동은 수목이 울창하여 홍수에도 맑은 물이 흐른다.

용출혈은 암석 가운데 구멍이 있는데, 용이 그 구멍을 통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는 설화가 있다. 충천암은 큰 바위가 마치 산을 이룬 듯한 형상이다. 학유정은 구룡포에 있는 이층의 정자로, 이곳에 오르면 절묘하게 사방을 울리는 폭포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속후팔경은 하천산(下天山)의 청풍(淸風), 성곶산(城串山)의 아침 안개, 어인봉(御印峰)의 저녁 구름, 서호지(西湖池)의 낙조, 수암사(水巖寺)의 저녁 종소리, 각씨암(閣氏巖)의 귀범(歸帆), 백사십리(白沙十里)·소당포(小塘浦)의 야우(夜雨) 등을 가리킨다.

하천산의 청풍이란 하천산에 있는 오래된 소나무 수풀 사이를 스쳐가는 바람을 노래한 것이다. 성곶산의 아침 안개는 성곶산 앞바다의 난류와 한류의 교차로 인하여 피어나는 물안개의 절경을 말한다.

어인봉의 저녁 구름은 속후평야를 내려다보며 우뚝 솟아 있는 어인봉을 가락지처럼 둘러싸고 있는 비단같이 고운 구름을 읊은 것이다. 서호지의 낙조는 속후면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서호지의 호수면에 비친 저녁 노을빛을 노래한 것이다.

수암사의 저녁 종소리는 설봉산의 중턱에 있는 수암사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가리킨다. 각씨암의 귀범이란 의호지 앞바다에 있는 아름다운 바위섬인 각씨바위로 황혼 무렵 줄지어 돌아오는 범선을 읊은 것이다.

백사십리는 면의 최남단 해변에 펼쳐져 있는 모래사장으로 뒤로는 수십 년 된 아름드리 노송이 병풍처럼 쳐져 있는 명승지이다. 소당포는 일명 소서호(小西湖)로 광활한 호수 면이 여러 차례 굴곡을 이루며 길게 이어져 절경을 이루는데, 이곳에 축축이 내리는 밤비는 이튿날의 맑고 갠 날씨를 의미한다.

신창읍의 연대봉은 아흔아홉 굽이의 절벽으로 유명하며, 그 밖에 북청읍과 덕성면 남부 경계에 있는 영덕산, 하거서면 임자동리 한복판에 있는 만경대(萬景臺) 등도 명승지로 알려져 있다.

읍·면

[북청읍 北靑邑]

군의 중앙에 위치한 읍. 면적 79㎢, 인구 3만 742명(1944년 현재). 읍 소재지는 내리이다. 북청면에서 1931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함경산맥에서 남류하는 남대천의 중류 동편에 위치한다.

북동부에는 읍의 주봉인 대덕산이 있으며, 서남쪽으로 남대천을 중심으로 한 평야가 전개된다. 장항·당포리 일대의 북청평야에서 쌀이 생산되며, 북상리와 죽평리에서는 잡곡이 많이 생산된다. 죽평리와 당포리에서는 원예작물이 활발히 재배된다. 죽평리의 돗자리는 북청의 명산물 가운데 하나이다.

공업으로는 당포리에 아마공장, 남리에 주석산 공장, 서리에 주물 공장(鑄物工場) 등이 있으나 특이할 만한 것은 없다. 시장은 동리와 서리에서 5일장이 서며, 주로 각종 농산물과 생활필수품이 거래된다. 특히, 남리에는 우시장도 있어 각 마을에서 사육한 각종의 가축이 매매된다.

교통은 동해안으로 가는 국도가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내륙의 풍산·갑산·혜산 방면으로 통하는 간선도로가 연결되어 있고, 그 밖에 군소 도로가 방사형으로 뻗어 있다. 철도는 함경본선의 신북청역에서 갈라진 북청지선(北靑支線)이 북청읍까지 이어져 북청역이 설치되어 있다.

유적으로는 서리에 1627년에 건립된 노덕서원이 있으며, 읍의 중앙의 북청읍성이 있다. 동덕산록에는 1901년에 세워진 삼의사가 있다. 명승지로는 동정공원(東井公園)과 영덕산공원(靈德山公園) 등이 있다.

내(內)·장항(獐項)·동흥(東興)·당포(棠浦)·남흥(南興)·남(南)·서(西)·북(北)·동(東)·중평(仲坪)·죽평(竹坪)·북상(北上) 등 12개 이가 있다.

[신창읍 新昌邑]

군의 남부에 위치한 읍. 면적 48㎢, 인구 2만 1798명(1944년 현재). 읍 소재지는 신창리이다. 조선시대 해안사(海晏社)·상포청사(上甫靑社)·하포청사(下甫靑社)가 있던 지역으로 1912년 사(社)가 면(面)으로 개편되면서 해안면·신창면·포청면으로 각각 바뀌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해안면과 포청면이 합쳐져 청해면(靑海面)이 되고, 1916년 청해면과 신창면이 합쳐져 신창면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1942년 신창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남대천 하류의 충적평야 지대로 남쪽은 동해와 접하고 있다. 비옥한 북청평야에서 벼농사가 행하여지며 그 밖의 지역에서는 조·감자·수수·보리·콩·팥 등이 주로 생산된다. 마늘·파·무·배추의 채소류 생산지로도 알려져 있다.

농가의 부업으로는 누에치기가 행하여지고 약초도 재배된다. 수산업은 신창항과 장호리항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며, 명태·대구·청어·정어리 등이 많이 잡힌다. 따라서 수산물 가공 공장도 많이 설립되어 있다.

농산물과 수산물이 풍부하게 생산되므로 군내 굴지의 매일 서는 시장인 신창장이 번성하여 매매가 활발히 이루어진다. 교통은 북청읍에서 신창역을 거쳐 거산 방면으로 가는 국도가 통과하며, 속후에서 신창을 거쳐 거산으로 가는 해안선 이등도로가 지난다. 신창항에서는 원산·부산 등 주요 항구로 정기 여객선이 운항된다.

유적으로는 토성리에 숙신고도토성이 있다. 명승지로는 신창항구에 연대봉이 연꽃 봉오리의 자태를 드러내고 우뚝 솟아 있다. 신창(新昌)·신풍(新豐)·만춘(晩春)·토성(土城)·경안대(景安擡)·포청(甫靑)·예원(藝園)·덕음(德音)·승평(昇坪)·장호(長湖) 등 10개 이가 있다.

[신포읍 新浦邑]

군의 서남부에 위치한 읍. 면적 45㎢, 인구 2만 6126명(1944년 현재). 읍 소재지는 신포리이다. 본래 소양화사(小陽化社)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신포면으로 개칭되었다가 1937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북으로 홍원군계의 종산에서 뻗은 산맥이 서부 경계를 이루면서 읍의 중앙부가 높고 남부 해안의 평지에 신포만이 펼쳐진다. 또한, 앞바다에 마양도(馬養島) 및 인접한 작은 대구도(大邱島) 등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본래 함경남도가 어획량이 많은 곳이지만 그중에서도 이 부근은 한대성 어족, 특히 명태와 송어 및 고래 등의 어획량이 많다. 그래서 마양도를 중심으로 한 어장에 수산업 종사자가 3분의 1 이상을 차지한다.

농업은 주로 보주 지역을 중심으로 벼농사가 행하여지며, 이 밖에 잡곡도 생산된다. 특수작물로는 과수 재배가 유명하며 누에치기와 대마·약초 등의 재배도 일부 행하여진다. 보주 지역과 노평리를 제외하고는 반농반어(半農半魚)의 지역이 대부분이다. 한편, 그 밖의 산업으로는 풍부한 어족과 어획량으로 인하여, 통조림을 만드는 식품 가공업이 발달하였다.

함경남도의 최대섬인 마양도는 조선 초기에 유명한 군마 양육처로 이용되어 왔는데, 무엇보다도 부근의 명태잡이가 성황을 이루며 동단에는 등대가 있다. 신포와 마양도 간의 해상 교통은 매일 수차례 정기 연락선이 내왕하여 편리한 편이다.

교통은 1921년 함경선의 중앙에 위치한 신포역이 부설되었으며, 해로는 남쪽으로 원산·부산까지, 북쪽으로 단천·성진·나진·웅기 등으로 정기선이 운항되었다.

신포(新浦)·문암(文巖)·석정(石井)·중흥(中興)·도서(島西)·토성(土城)·육대동(六擡東)·육대서(六擡西)·노평(蘆坪)·중보주(中寶珠)·상보주(上寶珠)·연호(蓮湖)·신호(新湖) 등 13개 이가 있다.

[가회면 佳會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108㎢, 인구 6,540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중리이다. 조선시대에 가회사(佳會社)로 불려오다가 1912년 읍면제가 실시되면서 가회면으로 개칭되었다.

지형은 대체로 서고동저(西高東低) 하여 서쪽으로 희사봉 산맥이 남하하면서 군내의 최고봉인 거두봉 및 남령(南嶺)을 형성해 놓았다.

한편 지류인 효자천(孝子川)이 면의 북쪽에 치우쳐 동류하므로 서남부가 높은 가운데 남대천 중류 유역의 지류가 합류하여 비교적 광대한 평야가 펼쳐져 있다.

동부 평야 지대에서는 논농사가 이루어지며, 서부 산간지대에서는 조·감자·콩의 생산 및 소사육·양봉·누에치기 등의 부업도 성하다. 초리와 마산리에서는 과수 재배가 활발하다.

교통이 불편하고 지하자원이 부족하며 공업이나 상업은 인접한 북청읍에 의존한다. 주민들의 대부분이 경제활동을 가까운 북청읍 시장을 중심으로 행하며 교육 시설 또한 북청읍을 이용한다. 중(中)·나흥(羅興)·봉의(鳳儀)·마산(馬山)·초(初) 등 5개 이가 있다.

[거산면 居山面]

군의 동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171㎢, 인구 1만 564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평리이다. 1910년 상거산면·하거산면이 합쳐져 현재의 면이 되었다. 북쪽으로 대덕산이 있으며, 남쪽은 동해에 접한다.

따라서 지형상 북고남저(北高南低)의 삼각형 지형에 동해로 흐르는 거산천 유역에 면이 형성되어 있어 계곡 및 하류 평야와 해안 평야가 주요 생활 무대를 이룬다. 특히 평리 일대에는 광활한 거산평야가 펼쳐져 있는데, 토지가 비옥하고 농산물이 풍요로워 인구가 이곳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

바다에 면하고 있어 포구도 발달하였는데, 건자포(乾自浦)는 미역 생산으로 유명하며 북청군의 최북단에 위치한 어항이기도 하다. 농업은 벼농사가 주이며, 콩·팥 등의 잡곡도 생산된다. 요즈음에 와서는 과수의 재배도 활발하다.

임업으로는 양질의 목탄이 많이 생산된다. 축산업으로는 축우·양계·양돈이 성하다. 이 밖에 양봉이 산림 지대에서 행하여지는데, 거산꿀은 질이 좋기로 알려져 있다.

수산업으로는 동해의 거호포(巨湖浦)·홍진포(鴻津浦)·건자포 등의 어촌에서 조개류·해초류 등이 많이 채취된다. 포항리 일대에서는 철광석이 채굴되며, 건자포 부근에서는 천일제염이 행하여진다.

교통은 함경선이 동서로 통과하며 거산역과 건자역이 설치되어 있다. 유적으로는 포항리의 만령(蔓嶺)에 고려 예종 때 윤관이 여진족을 평정하기 위하여 쌓은 구성 가운데 하나인 시중대가 있다. 하입석리 성천촌 뒷산에는 여진성지가 있다. 평(坪)·포항(浦項)·하세동(下細洞)·상세동(上細洞)·상입석(上立石)·하입석(下立石) 등 6개 이가 있다.

[덕성면 德成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139㎢, 인구 1만217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수동리이다. 조선시대 상사(上社)·하사(下社)로 구분되어 오던 지역으로 1912년 합쳐져 현재의 덕성면으로 개편되었다.

지형상 남대천 중류의 유역 평야가 대체로 서쪽으로 기울어져 펼쳐지는 반면, 동반부는 산간지대를 이룬다. 동쪽의 이원군과는 높은 영덕산으로, 그리고 거산면과는 대덕산으로 경계를 이루어, 동쪽은 대체로 500m 이상의 산간지대이다.

농업은 비교적 기름진 평야가 각처에 산재하고 있으며, 양덕수리조합 등 수리 시설이 잘 발달되어 있어서 농작물이 풍요로운 편이다. 수동리·수서리·이망지리 등지에서 주로 논농사가 이루어지며, 그 밖의 지역에서는 밭농사가 이루어진다. 과수 재배도 활발하며, 누에치기·양봉 등이 농가의 부업으로 행하여진다.

교통은 북청읍에서 혜산까지 가는 국도가 면을 남북으로 지난다. 유적으로는 고려 중엽 학암(鶴巖)이라는 명승이 창건하였다는 학린암(鶴隣庵)이 있다. 또한 이망지산성(泥望只山城)·용미동산성(龍美洞山城)·금반덕산성(金盤德山城)의 터가 있다.

수동(水東)·동장내(東庄內)·서장내(西庄內)·수서(水西)·죽전(竹田)·이망지(泥望只)·주의동(主義洞)·어은(魚隱)·만항(滿項)·서흥(西興) 등 10개 이가 있다.

[상거서면 上車書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420㎢, 인구 1만 1260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중돌리이다. 조선시대까지 거서사(車書社)에 속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상거서·하거서로 분할되어 상거서면으로 되었다.

서쪽으로 태백령(太白嶺, 1,143m), 북쪽으로 희사봉, 동북쪽으로 마산(馬山, 1,709m), 동쪽으로 차일봉, 남쪽으로 거두봉 등의 높은 산이 경계를 이루면서 솟아 있다. 또한 남대천의 지류인 거서천이 면의 중앙을 흐르고 있다.

따라서 지형상 거서천의 상류 유역에 속하는 이 면은 서·북부에 높은 산이 솟아 있어 높고, 동부가 비교적 낮은 가운데 강 유역의 계곡이 중앙에 동서로 펼쳐 있어 주요 생활 무대를 이룬다.

산간지대이므로 대체로 밭농사가 이루어지며, 엄동리 일대 약간의 평야에서 벼농사가 행하여진다. 조·감자·보리·콩·팥·옥수수 등이 주로 생산되며, 특히 잎담배는 품질이 우수하기로 이름나 있다. 이 밖에 가축사육·누에치기·양봉 등의 농가 부업이 활발하다.

또한 방대한 임야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원목도 많이 생산되어 철도 침목·건축재·목기 제품 등이 다른 지역으로 반출되고 있다. 희사봉과 차일봉 일대에서는 인삼이 다량으로 생산된다. 신태리에서는 질이 좋은 흑연·철·은·동 등이 생산되나 교통이 불편하여 그다지 발전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통은 산악 지대이므로 불편하다. 하거서면에서 이 면의 중앙을 지나 신태인으로 가는 지방도로가 있으며, 철도는 지나지 않는다.

명승지로는 중국의 한무제(漢武帝)가 신선과 함께 이곳에서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이 있는 한무탑(漢武塔)과 불결한 사람이 입산하면 해를 입는다는 차일봉의 유선암(留仙菴)을 꼽을 수 있다. 이 밖에도 ○산개폭포·난동폭포(蘭洞瀑布) 등이 있다. 중돌(中乭)·신태(新泰)·상돌(上乭)·하돌(下乭)·수서(水西)·엄동(嚴東) 등 6개 이가 있다.

[성대면 星垈面]

군의 동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420㎢, 인구 1만 2986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평리이다. 조선시대 성대사(星垈社)가 있던 지역으로, 1912년 지금의 면으로 개편되었다.

북쪽으로 검덕산과 대덕산이 풍산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하천으로는 남대천의 동북 지류인 곤파천과 서쪽 지류인 향동천이 흐른다. 양 지류가 합류하는 남대천 본류 부근의 중앙에 다소의 평야가 전개되며, 대부분이 산간 지역이다.

농업은 밭농사가 중심이 되어 조·감자가 주산물이며, 장흥 일대에서 약간의 벼농사가 행하여진다. 각 마을마다 축산과 누에치기가 활발하다. 임산물은 자급자족할 정도이며, 머루와 다래 등이 많이 산출된다.

동과 서의 계곡을 따라 달리는 도로가 이곳의 주요 교통로이며, 북청에서 혜산 간의 국도가 교차되는 장흥에 여러 공공시설이 있어 이곳 주민 생활의 중심을 이룬다. 산과 계곡의 절경이 자랑인 성대금강팔경에는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평(平)·양평(楊平)·승동(勝洞)·조양(朝陽)·수서(水西)·보성(寶星)·창성(昌星) 등 7개 이가 있다.

[속후면 俗厚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74㎢, 인구 1만 5998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서호리이다. 조선시대 속후사(俗厚社)가 있던 지역으로 1912년 면제(面制)로 개편되면서 속후면이 되었다. 1933년 평산면의 대부분 지역을 편입하여 현재의 광활한 지역을 이루게 되었다.

지형상으로는 배산임수의 호조건에 동부의 기름진 충적평야와 남대천의 퇴적물이 연안 조류로서 이룬 석호의 발달이 대단하다. 또한 군내 최대의 오산호(鰲山湖)와 현금호(絃琴湖) 등 큰 호수가 발달하고 있다.

평야 및 야산 지대에 큰 하천, 해안에 아름다운 호수와 백사장, 그리고 연안 어족이 풍부한 해안을 끼고 있어 주민의 생활환경이 좋다.

남대천 하류에 있는 만큼 관개 수리 시설이 잘되어 있어서 해마다 풍작을 이룬다. 곡물재배와 삼의 특용 작물재배·누에치기·과수 재배 등이 성하다. 또한 수산업은 근래 어장이 좋으나 포구가 적고 불편하여 특기할 만한 어획이 없다. 주민 생활은 속후장을 이용하며, 교통은 함경선이 개통됨에 따라 강산역·속후역이 세워져 큰 구실을 한다.

경승지로 속후 해변은 10여㎞에 걸쳐 푸른 소나무로 둘러싸인 백사장이 펼쳐 있는 데다 못까지 곁들여 절경을 이룬 최상의 해수욕장이다. 고적으로는 여진문자로 쓰여진 여진비(女眞碑)가 창성리에 있다.

서호(西湖)·강상(江上)·남호(南湖)·의호(義湖)·현금(絃琴)·나호(羅湖)·오매(梧梅)·연주(蓮珠)·하천(下天)·창성(蒼城)·상창(上倉)·간평(間坪)·서도(西島)·서원(西園)·광천(廣川)·용전(龍田) 등 16개 이가 있다.

[신북청면 新北靑面]

군의 동남부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77㎢, 인구 1만 551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신북청리이다. 조선시대 양천사(楊川社)·양가사(良家社)·중산사(中山社)가 있던 지역으로, 그 뒤 면제로 개편되었다가 다시 양천면·양가면·평산면의 일부를 편입하여 지금의 면으로 되었다.

동북쪽에 대덕산이 있으며, 지형상 동북이 높고 서남이 낮은 경사면을 이루며, 특히 남대천 유역의 평야는 비옥한 농경지를 이루며 관개시설이 잘되어 군내에서 쌀 생산이 가장 많고, 보리·콩·팥 등의 잡곡도 자급자족할 정도로 생산된다.

양천리·동중리·동상리 등지에서는 야채류가 많이 생산되어 다른 지역으로 반출된다. 이 밖에도 배·사과·복숭아 등의 과수 재배가 활발하여 군내 각 시장에서 판매된다. 농가의 부업으로 양돈·양계가 성행한다.

교통은 함경선이 동서로 통과하며 신북청역이 설치되어 있고, 남대천을 횡단하는 함경도에서 가장 긴 신북청 철교가 놓여 있다. 신북청역에서는 다시 삼기철산까지의 북청선 지선철도가 갈라져 나간다. 이 밖에 서울에서 함경북도로 가는 일등국도가 면의 중심부를 통과하는 등 교통이 편리하다.

신북청(新北靑)·초(初)·신상(新上)·보천(寶泉)·양천(楊川)·하(下)·동중(東中)·동상(東上)·무우대(無憂擡) 등 9개 이가 있다.

[양화면 陽化面]

군의 서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83㎢, 인구 1만 1995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동리이다. 조선시대 대양사(大陽社)와 양평사(陽坪社)가 있었으나 1914년 사(社)가 폐지되면서 양화면으로 개편되었다. 1929년 신포면의 동쪽에 있던 3개 이가 편입되었다.

동북단의 압해산과 서북단의 태양산의 연결 및 남쪽의 동해안이 배산임해의 지형을 이루었으며 해안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또한 비옥한 평야에 남대천과 호수를 이용한 수리 시설이 잘되어 농업이 발달되었으며, 연해의 양화만에 어족이 풍부하여 후호(厚湖) 등 어항 중심으로 명태·고등어·은어 등이 많이 잡힌다.

주민 생활은 일찍이 양화장을 이용하여 잡화·소·콩·마포 등의 상거래가 활발하였으며, 수산물은 후호리에 집산되었다. 또한 후호리·유호리에는 정어리 공장이 많기로 유명하다.

교통은 북청읍으로 이어지는 국도가 통하고 있고, 1925년 함경선이 개통되면서 양화역이 설치되었다. 한편 해로를 통하여도 인근 주요 항구와 연결되어 수륙 교통이 편리한 편이다.

유적으로는 호만포리에 경의사(景義祠)가 있다. 이는 임진왜란 때 문묘제위판(文廟諸位版)과 제기·경서 등을 도피시켜 잘 보존한 형조참판 손윤문(孫允文)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동(東)·양화(陽化)·후호(厚湖)·유호(楡湖)·남안대(南安擡)·방가대(芳佳臺)·호만포(湖滿浦)·창유(昌楡)·부창(富昌) 등 9개 이가 있다.

[이곡면 泥谷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535㎢, 인구 1만 7296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초리이다. 조선시대 이곡사(泥谷社)였던 지역으로 1912년 사가면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이곡면이 되었다.

북쪽으로 풍산군과 함경산맥의 능선을 경계로 접하고 있으며, 남대천의 상류 유역에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준령인 남산봉(南山峰, 1,684m)·용수동령(龍水洞嶺, 1,531m)·검덕산 등 1,500m가 넘는 산이 북쪽 경계를 이루며, 이 사이에 북청에서 갑산(甲山)에 이르는 후치령(厚峙嶺)이 면을 종관한다.

동남쪽으로는 송이령(松耳嶺)·망덕봉(望德峰) 등 1,000m 이상의 산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마산·차일봉 등 1,600m 이상의 산이 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또한 지형상 남대천 상류의 세 갈래 지류가 갈라지는 곳으로 험한 산간 계곡으로 인해 평야가 거의 없는 만큼 인구가 희박하다.

농업은 초리의 일부 지역에서 벼농사가 행하여지나 대부분의 지역에서 밭농사를 하여 조·콩·팥·보리·감자 등이 주로 생산된다. 농가의 부업으로 누에치기·양돈·양계·양봉 등이 행하여진다.

광업으로는 인동리에 금광이 있으며, 특히 상리에 있는 철광은 매장량이 무진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찍부터 주민들이 원시적인 방법으로 채굴하여 농기구를 제작하여 사용해 왔다.

교통은 후치령을 경유하여 혜산까지 이르는 국도가 면을 남북으로 지난다. 명승지로는 인동리에 구단동굴(九段洞窟)이 있다. 초(初)·중(中)·상(上)·인동(仁洞)·제초(濟初)·제중(濟中)·제상(濟上) 등 7개 이가 있다.

[하거서면 下車書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94㎢, 인구 1만 830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임자동리이다. 조선시대 강 유역 전체가 거서사(車書社)에 속하였으나 1912년 사가 면으로 개편되면서 상거서·하거서로 양분되어 하류 지역이 하거서면으로 되었다.

거서천이 지역의 남부에 치우쳐 흘러 남부가 대체로 낮은 평야 지대를 이루는 데 반하여 북반부는 500m 이상의 고지대를 이룬다. 농업을 주로 하며 논과 밭 비율이 반반으로 거의 비슷하다. 논과 밭의 농사 외에 산지에서 밤이 많이 재배되며 과수 재배도 활발하다. 농가 부업으로는 양계와 양돈이 행하여진다.

공업으로는 특기할 만한 것이 없으나 임자동의 알연옹기가 이름나 있다. 시장으로는 임자동 만경대에 2일과 7일의 5일장이 서며 주로 생활필수품이 거래된다. 또 여기에 우시장도 병설되어 군내 각지에서 중개인이 몰려와 매상고가 적지 않다.

교통은 면의 중앙을 삼등도로가 지난다. 명승지로는 임자동리에 만경대가 있다. 임자동(荏子洞)·상신흥(上新興)·하신흥(下新興)·덕우대(德友擡)·월근대(月近擡)·월상(月上) 등 6개 이가 있다.

[후창면 厚昌面]

군의 서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84㎢, 인구 1만 8237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이리이다. 1912년 인후사(仁厚社)와 인창사(仁昌社)가 합쳐져 후창면이 되었다.

서쪽으로 면의 제일봉인 종산(鍾山, 705m)이 홍원군 용포면과 경계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광대산과 압해산(壓海山), 북쪽으로 무치령(舞雉嶺)·시대산(始大山)·천의봉(天儀峯) 등이 면을 둘러싸고 있다. 무치봉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종고천(鐘古川) 유역에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남대천의 풍부한 수리와 종고천의 혜택으로 곡창 지대를 이루며, 주요 농산물로는 쌀·조·콩·피·보리 등이 있고, 감자·채소도 자급자족한다. 부업으로 누에치기가 행하여지고 있다. 특산물로는 통이리의 병배가 유명하다. 지하자원으로는 통이리에서 질이 좋은 고령토가 산출되어 오지그릇이 유명하다.

교통은 동해안의 국도가 홍원군 태안에서 면의 서쪽 남갈령을 넘어 들어와 면을 동서로 관통하여 북청읍으로 이어지며, 그 중간에 이리에서 남쪽의 양화면을 거쳐 북상하는 이등국도와 합류한다. 따라서 교통은 중앙인 이리를 중심으로 국도가 세 갈래가 되어 편리한 편이다.

명승지로는 면의 수호산인 종산과 시대산의 꼭대기에 있는 용연이 알려져 있다. 이(二)·통이(通耳)·오평(梧坪)·부동(富洞)·일(一)·당우(唐隅)·동평(東坪) 등 7개 이가 있다.

광복 후 변천

1952년 12월 신포읍·양화면·속후면은 신포시로, 덕성면·이곡면·하차서면·상차서면·성대면은 덕성군으로 분리, 이관하였으며, 용전리를 제외한 신창읍·후창면·거산면·신북청면으로 신창군을 신설하였다. 한편, 북청읍·가회면·후창면의 면 행정단위를 폐지하고, 이 단위로 분할, 통폐합하여 군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 1954년 10월 중리의 일부를 분리하여 마산리를 신설하였다.

1974년 1월 신창군이 폐지되면서 신창읍과 17개 이가 귀속 편입되었으며, 신창읍을 신창노동자구로 개편하였다. 현재 함경남도 동부 해안에 있으며, 서쪽은 홍원군, 남쪽은 신포시, 북쪽은 이원군·덕성군, 동쪽은 동해에 접하여 있다.

동경 128°04′∼128°36′, 북위 40°06′∼40°20′에 위치하며, 면적 약 595㎢, 인구 14만 5000여 명이다(1995년 현재).

행정구역은 북청읍과 신북청(新北靑)·신창(新昌) 2개 노동자구, 서(西)·죽산(竹山)·중평(仲坪)·청흥(靑興)·장항(獐項)·양가(良家)·안곡(安谷)·신상(新上)·용전(龍田)·당우(唐隅)·지만(芝滿)·문동(文洞)·부동(富洞)·오평(梧坪)·종산(鍾山)·초(初)·마산(馬山)·중(中)·봉의(鳳儀)·나흥(羅興)·나하대(羅下坮)·만춘(晩春)·덕음(德音)·예승(藝昇)·청해(靑海)·토성(土城)·경안대(景安坮)·양천동(楊川東)·양천서(楊川西)·동도(東島)·하호(荷湖)·보천(寶泉)·평(坪)·하세동(下細洞)·상세동(上細洞)·상립석(上立石)·반송(盤松)·건자(乾自) 등 38개 이로 되어 있다. 군 소재지는 북청읍이다.

이 지역은 저산성 산지가 많은 편이다. 서부는 거두봉산맥이 남동 방향으로 해안까지 뻗어 있으며, 거두봉(1,303m)·종산(703m) 등이 솟아 있다. 북쪽에는 대덕산(1,461m)·독솔봉(912m)이 있으며, 북동 지역에는 북두봉(784m)·삼봉(693m) 등 낮은 산들이 있다.

중심부에는 남대천(북청)과 지류인 동대천이 동해 방향으로 흐르고, 하류 유역에는 북청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해안선은 짧고 비교적 단조롭다. 기반암은 대부분의 지역이 중생대화강암으로 균일한 지질구조를 가지고 있다.

오랜 침식 삭박으로 급경사가 많고, 화강암 지역에서 흔히 보는 암류와 돌바위산들이 곳곳에 노출되어 있다. 토양은 대부분 갈색산림토이고, 일부 충적토와 산악 표백화 갈색산림토가 분포되어 있다.

기후는 해양성 기후의 특징을 나타낸다. 연평균 기온 9.1℃, 1월 평균 기온 -4.9℃, 8월 평균 기온 22.5℃이며, 첫서리는 10월 15일, 마감서리는 4월 20일경에 내린다. 연평균 강우량은 700∼750㎜이다. 산림은 군 전체 면적의 60%를 차지하며, 주요 수종은 이깔나무·소나무·잣나무·황철나무·가래나무 등이다.

농경지는 군 넓이의 약 25%이며, 그중 논은 35%, 밭은 40%를 차지한다. 북청평야 일대에는 보천·종산·봉의·옥평 등 13개의 저수지와 안곡·지만·예송 등 82개의 양수장들이 건설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옥수수·콩·감자이며, 공예작물로 담배를 재배한다. 과수업이 발달하여 사과·배·복숭아·살구가 생산되고, 그 밖에 자두·감·대추·추리 등도 재배되고 있다. 특히, 북청사과는 그 맛과 향기가 독특하여 예로부터 특산물로 알려져 있으며, 신창의 송이버섯도 유명하다.

축산과 양잠업도 발달하여 소·돼지·닭·양·토끼 등과 뽕누에를 많이 기르고 있다. 군내에는 6개의 수산협동조합이 배치되어 명태·고등어·도루메기·가자미·멸치·임연수어·송어 등 다양한 어종이 잡히고 있으며, 미역·다시마·조개 등의 천해 양식도 널리 진행되고 있다.

교통망으로는 평라선(평양∼나진)·북청선(신북청∼덕성) 등의 철도가 부설되어 있고, 동해안을 따라 함흥·북청·청진 간의 도로와 혜산시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다.

유적으로는 토성리에 청해토성(일명 청해평성)이 있으며, 성내에서 돌도끼·돌칼·돌창 등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죽상리에는 1467년(세조 13년)에 창건된 광제사가 현존한다. 그 밖에 홍도동산성·다탄대산성·용의동산성·별안대성·창동산성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신창공업대학·북청공업대학·북청과수대학·북청교원대학과 원예고등전문학교·북청고등중학교·성동고등중학교 등 각급학교가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북청읍지』
『함경남도지』(함경남도지편찬위원회, 1968)
『북청군지』(북청군지편찬위원회, 1970)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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