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으로 삼도(三都 : 한양·개성·평양)가 함락되고 함경도까지 적이 침략하여 나라가 위급하게 되자 선조는 장차 요동(遼東)으로 망명할 목적으로 의주방면으로 갈 때 평안도 박천에서 왕세자인 광해군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을 받들고 본국에 머물도록 하였다.
이때 조정을 갈라 의주의 행재소(行在所)를 ‘원조정(元朝廷)’이라 하고 세자가 있는 곳을 ‘분조(分朝)’라 하였다. 즉 분조는 선조가 요동으로 망명할 것에 대비하여 임금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라는 왕명에서 나온 소조정(小朝廷)이었다.
이에 영의정 최흥원(崔興源) 등 10여인의 중신들이 광해군을 따라 분조에 귀속되었다. 광해군은 종묘사직을 이끌고 평안도의 맹산·양덕, 황해도의 곡산을 거쳐 강원도 이천에 분조를 두고 남조의 장수들과 각 처의 의병장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격려하고 상을 내리고 관(官)에 임면(任免)하는 등 활동이 활발하였다.
왕세자가 이천에 머문 지 한달여 만에 적병이 사방에서 나와 위험을 느끼게 되자 다시 황해도를 거쳐 평안도 성천으로 갔다가 다시 영변으로 가서 분조를 이끌어갔다. 1593년(선조 26) 4월 왜병이 서울을 철수한 뒤에도 광해군은 위험을 무릅쓰고 호남지역까지 다니며 군민을 격려하며 민심수습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이로 인하여 임진왜란이 끝난 뒤 광해군 분조에 호종하여 공이 있는 사람에게 위성공신(衛聖功臣)을 책록하였으나 1623년(인조 즉위년) 인조반정으로 폐삭(廢削)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