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전국의 사찰은 사찰령에 의하여 30본 말사의 형태로 재편되었다. 이에 30본산의 주지들은 경성에 모여 교단의 사업을 이끌어 갈 중앙 기구를 만들고 기관지를 발행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초 교단이 교무원과 총무원으로 나뉘어 갈등을 빚게 되면서 1910년대에 발행되었던 기관지가 폐간되기에 이른다. 1924년 교무원과 총무원이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으로 통합되자,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불교를 홍보하고 각 본산 간의 소식을 공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불교사(佛敎社)를 설립해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기관지로 월간 『불교(佛敎)』를 창간하였다.
월간 『불교』는 1924년 7월부터 1933년 7월까지 통권 108호를 발행하고 휴간되었다. 잡지가 발간되는 동안 편집 겸 발행인은 한 번 교체되었다. 창간호부터 83호까지는 권상로(權相老)가 발행 책임을 맡았으며, 84 · 85합호부터 종간호까지는 한용운(韓龍雲)이 발행 책임을 맡았다. 발행 기관도 중간에 교체되었다. 창간호부터 69호까지는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담당했으며, 70호부터 93호까지는 불교사가 독자적으로 운영했고, 94호부터 종간호까지는 조선불교선교양종 중앙교무원이 예산을 집행하였다. 당시 교단의 여러 가지 사업을 집행하는 데 있어 재정적인 문제가 뒤따랐기 때문에 발행 기관이 교체된 것으로 분석된다. 월간 『불교』가 108호를 끝으로 휴간된 것도 재정적 문제에 기인한 것이다.
이후 1937년 3월 경남삼본산 종무협회가 『불교』와 같은 표제로 잡지를 속간(續刊)하여 1944년 12월까지 통권 67집을 발행하였다. 제30집부터는 조선불교조계종 총본산(總本山)인 태고사가 발행을 담당했다. 속간 이후의 편집 겸 발행인은 허영호, 김삼도, 장도환, 임원길 등이 맡았다.
『불교』는 종교 잡지로서 독자들의 투고(投稿)를 권장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이거나 사상적인 원고는 배재한다는 편집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이 잡지에는 종교성을 다룬 논설, 불교개혁론, 경전의 번역, 전통 문화의 소개, 불교 문학작품 등 근대 불교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다양한 장르의 글이 총망라되어 있다.
처음 편집 겸 발행인이었던 권상로는 현 불교계의 사업 방향이나 제도, 승려들의 생활 등 주로 교단 내부에 대한 비판 내지 반성을 촉구하는 논설을 많이 게재하였다. 또한 불교 홍보, 교리적 해설 등을 잡지의 중심 테마로 삼았다.
그러나 한용운이 발행인이 되면서 잡지의 성격에 약간의 변화가 나타난다. 「불교청년운동에 대하여」, 「정교를 분립하라」 등의 논설을 통해 정교분립(政敎分立), 사찰령 철폐 등을 주장하면서 기존의 편집 원칙을 과감히 깨트렸던 것이다. 잡지의 이와 같은 논조는 총독부의 불교 정책을 의식해야 했던 교단의 중앙 간부들로부터 견제를 받게 되었다. 이에 재정난까지 겹치면서 결국 잡지가 발행되지 못하고 중단되고 만 원인이 되었다.
속간 『불교』도 기본적으로는 종교 잡지의 성격을 가지고 발행되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시기가 되면서 일제의 전쟁 동원에 협력하고 태평양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논설들을 많이 게재함으로써 친일적인 성향으로 변모하였다.
『불교』는 근대에 발행된 대표적인 불교 잡지이다. 이 잡지는 불교의 교리 및 신앙과 관련된 문제뿐만 아니라 당대 불교계의 동향과 인식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한용운, 권상로, 백용성, 백성욱, 허영호 등 당대의 석학들이 남긴 다양한 글들은 근대 불교학 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로 그 의미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