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는 호국불교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기 때문에 국난기에는 구국의 대열에서 공헌한 바가 컸다.
한말 의병전쟁도 승려들과 긴밀한 관계 속에 전개되었을 정도로, 사찰은 일제에 있어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에 일제는 한국의 사찰을 억압하기 위해 이 법령을 서둘러 제정, 공포하였다.
「사찰령」은 1911년 6월 3일 공포된 것으로 전문 7조와 부칙으로 되어 있다. 그 해 7월 8일 전문 8조로 된 시행규칙이 공포되었다. 그 내용에 담긴 일제의 침략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제1조에서는 사찰 전체를 관리·통제하고 있다. 사찰의 병합·이전·폐사는 물론, 사원의 명칭을 변경하는 것까지도 총독의 허가를 받게 하여 수천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의 사원을 자율적으로 관리할 수 없도록 하였다.
둘째, 제2조에서 사찰의 기지(基址)와 가람(伽藍)은 지방장관의 허가를 하여 사원 내의 집회자유를 억압하고, 나아가서는 사원이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하거나, 항일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지 못하도록 하였다.
셋째, 제3조에서는 본사와 말사와의 관계, 승규(僧規)·법식(法式) 등의 사법(寺法)을 별도로 제정해 총독부의 허가를 받게 하여 사찰의 자주권을 박탈함은 물론, 조선총독을 불교의 교조(敎祖)에 버금가는 위치에 놓아 한국불교를 말살하였다.
넷째, 제4조에서는 주지의 권한을 인정하는 듯 규정하고 있으나, 전후 조항으로 볼 때 그 권한은 대폭 축소되었다. 또한 시행령 제2조에서 조선총독이 주지임명권을 가지게 하여 실질적으로 그 권한을 유명무실하게 하였다.
그 밖에도 제5·6조에서는 사찰의 재산권을 박탈하고, 승려에 대한 처벌규정을 두었다. 제7조에서는, 이 밖에 필요한 사항은 조선총독이 정한다는 단서항을 두어 본령(本令)에서 누락된 사항은 필요에 따라 통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두었다.
이로써 한국불교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관인 조선총독부 감독 하에 예속되었으며, 한국불교 교단은 30본산(1924년 화엄사가 승격되어 31본산사로 되었음.)으로 나누어졌으며, 사찰의 기본 권한이라 할 수 있는 의식(儀式)·인사(人事)·재정(財政) 등의 모든 권한이 침해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사찰령」만으로써 한국불교를 말살할 수는 없었으며, 오히려 항일민족종교로서 그 기반이 굳혀졌다고 할 수 있다.